인문학을 바라보는 저의 시각을 전하고자 합니다. '인문학은 뭘 하는 학문일까?'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인문학을 감성적으로 접근합니다. 하지만 인문학도 엄연한 학문입니다. 이성적인 영역에 더 가깝습니다. 생각보다 딱딱한 분야입니다. 자연과학에 비해 인문학은 이런 오해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주장을 들어보면서 그런 오해들이 정말 오해인지 아닌지 살펴주세요. 제가 개소리를 하는 것 같다 싶으면 지적해 주세요.
인문학은 모델을 만드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상상을 대표하는 학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모델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문, 인류가 남긴 모든 것을 탐구합니다.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간 자체를 알고자 합니다. 인간을 직접 뜯어볼 수는 없으니까요. 막상 살펴보니 문화, 기록 등 인류가 남긴 것들에서 일정한 방향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폭력을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무자비하게 폭력적입니다. 가지각색의 언어를 사용하고 여러 종류의 문자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최대한 그럴듯한 모델, 이미지, 도식을 상상합니다. 무한하게 새로운 모델을 쏟아냅니다. 인간이 고정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고, 인문학은 이런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문학은 문학 작품을 탐구합니다. 생각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그것이 왜 효과적인지 등을 탐구합니다. 생각을 표현하고 이를 감상하는 것 모두 인간입니다. 문학 작품을 단서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죠. 표현 방식과 그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모델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에서는 질문을 건네는 듯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말이죠. 문어체로 썼으면 충격이 덜했을 겁니다. 이를 통해 '당구 모델'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당구공으로 표현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구공은 당구공에 부딪쳐 움직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질문을 건네는 듯한 표현이 읽는 이에게 충격을 주는 데 기여했다고 해석하는 것이죠.
모든 인문학의 모델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잠재적인 쓸모를 가집니다. 인문학을 왜 하는 걸까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소리 많이 합니다. 도대체 뭘 보고 그런 얘기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인문학이 우리 사고에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을 이루는 것 중에 직관과 상상이 있습니다. 사고보다는 덜 의식적인 부분입니다. 직관과 상상은 때로 사고와 섞여서 근본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아이디어가 번뜩일 때처럼요. 직관과 상상에 기여하는 것이 인문학적 모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현상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인문학의 여러 모델을 알고 있으면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구도로 사고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이 쓸모가 없어서 쓸모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아닙니다. 인문학은 그 자체로 쓸모가 있습니다. 다만 잠재적이고 근본적인 쓸모일 뿐입니다. 이는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학은 사료를 탐구합니다. 무엇을 사실로 볼 것인지, 그 사실이 전체 흐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을 탐구합니다. 이를 통해 현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자 합니다. 세계화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나라 사이의 연결이 더 촘촘해지는, 마치 그물이 점점 촘촘해지는 모델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델도 잠재적인 쓸모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물인터넷, 웨어러블 기기 같은 곳에 이런 모델이 적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물의 연결이 점점 촘촘해지는 것이죠. 인문학의 모델은 이런 식으로 직관, 상상과 연결되어 뭔가를 착안하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을 어떤 식으로 공부해야 할까요? 인문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보통 공부를 한다고 하면 배운 것을 익히는 데 많은 힘을 쏟습니다. 누군가가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지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죠. 서로 합의된 내용을 익히는 것은 지적 소통을 위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문학을 공부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상상을 발휘하는 일입니다. 모든 인문학의 모델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단순히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모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단순히 다른 이들의 인문학적 성취를 깔끔하게 정리한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왔느냐를 살펴야 합니다. 인류의 시행착오를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모델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적 소양입니다.
예를 들어, 철학은 철학자들의 고전을 탐구합니다. 다른 이들이 얼마나 새로운 생각을 했는지,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쳤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내용을 익히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사상 역시 얼마든지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이론을 외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아주 오래전에는 객관적인 대상이 전제되어 있고 그 주변에서 인식 주체가 대상을 인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는 인식 주체가 중심이 되어 대상의 존재가 인식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오래전에는 인식 주체가 인식하든 말든 객관적인 나무가 존재한다고 봤는데, 근대에 들어서는 인식 주체가 인식하는 나무만을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 둘 모두 하나의 모델일 뿐입니다. 이 두 모델을 익히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새로운 모델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상과 인식 주체가 서로 주체가 되어 인식될 수 있다든지 말이죠. 이것이 철학함이고, 인문학적 소양입니다.
최근에 보면 인문학적 지식들은 매우 잘 정리가 되고 교양 책으로도 만들어져서 널리 퍼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문학적 역량을 발휘하는 일, 자신의 상상을 발휘해서 인간 자체를 탐구하는 일에는 사람들이 소홀한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인문학은 모델을 만드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잘 드러나지 않는 잠재적인 쓸모를 가진 학문입니다. 인문학을 공부할 때는 자신의 상상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를 잘 기억하고 좀 더 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