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듣고, 릴스를 보고, 발의 저림을 느끼고, 딸기를 맛보고, 땅을 밟고, 과학 지식을 습득하고, 자신의 내면을 관찰합니다. 세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 걸까요? 이는 인류의 아주 오래된 물음입니다. 감각적 경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이도 있었고, 수학적 지식도 경험을 통해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 이도 있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펼쳤듯, 저도 저만의 주장을 펼쳐 보고자 합니다.
우선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느낌의 철학: 감소(感素)에 대해서〉라는 글에서 감소라는 개념을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만든 것입니다. 감소는 철학적인 맥락에서의 느낌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종류의 느낌들의 정체입니다. 인간은 오직 여러 종류의 감소들로만 이루어진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감소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사실 세계의 모든 것들이 감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감소는 유한하거나 무한한 넓이의 면입니다. 평면일 수도 있고 곡면일 수도 있죠. 세계는 무한히 많은 종류의 면, 즉 감소로 이루어집니다. 보이는 느낌에 관한 면, 들리는 느낌에 관한 면, 시간이 흐르는 느낌에 관한 면, 공간을 파악하는 느낌에 관한 면 등등이 있죠. 이 면들은 알 수 없는 원리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하나의 감소만으로 이루어지거나, 둘 이상의 감소가 서로 접촉함으로써 만들어집니다. 어떤 종류의 감소들끼리 접촉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개체들이 만들어집니다. 분자를 포함한 일반적인 사물들은 물리적 충격에 관한 감소, 온도 변화에 관한 감소 등이 접촉하는 곳에서 만들어집니다. 식물에게는 몸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에 관한 감소가 없지만, 계절의 변화에 관한 감소가 있습니다. 식물을 구성하는 다른 감소들이 그 위에 접촉하는 점에서 식물이 만들어집니다. 동물에게는 삶의 방황에 관한 감소가 없지만, 예민한 청각에 관한 감소가 있습니다. 동물을 구성하는 다른 감소들이 그 위에 접촉하는 점에서 동물이 만들어집니다. 모든 개체들은 일종의 점입니다. 여러 종류의 면들이 동시에 접촉하는 한곳에 생기는 점인 것이죠.
왜 하필 감소를 면에 비유했을까요? 첫째, 개체들끼리 같은 종류의 감소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면 위에 각자의 접촉점을 두고 있는 개체들은 해당 감소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물은 물리적 충격에 관한 감소를 공유하고 있죠. 모두 물리적 충격이라는 하나의 면 위에 각자의 접촉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면의 형태는 이러한 감소의 공유를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둘째, 감소의 내용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지금도 우리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것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이는 면의 움직임에 따라 접촉점이 이동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면 위에서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해당 감소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어머니께서 "밥 먹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가지고 있는 감소 중 (공기의) 진동에 관한 감소, 소리에 관한 감소, 기분에 관한 감소, 의지에 관한 감소 등이 변합니다. 각 면이 움직이면서 접촉점의 위치가 바뀌고, 그에 따라 감소의 내용 또한 바뀐 것이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감소에 따라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인간으로서 인식하는 세계가 진짜 세계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는 것이죠. 이미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예가 있습니다. 인간은 가시광선밖에 볼 수 없죠.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진동수의 범위도 정해져 있습니다. 인간은 3차원이라는 아주 특수한 형식으로 세계를 지각하죠. 우리에게 그렇게 감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것도 지금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지만 합리적이라는 느낌뿐일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제가 제시한 이러한 모델 또는 공상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죠. 자유로운 상상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델이 우리 사고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마냥 부질없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관점 자체를 변화시켜서 그에 따라 여러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러한 모델은 인간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으로서 인식하는 세계가 진짜 세계의 모습과 다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칸트를 계승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비판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