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막 유머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유머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유머는 살아가면서 매우 유용한 도구일 것입니다. 사람들이랑 친해지는 데도 좋고, 누군가랑 싸워서 화해하거나, 힘든 시간을 지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래도 유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물론 그게 제 유머 실력을 키워줄지는 모르겠지만요.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자신도 모르게 그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를 순식간에 쫙 그립니다.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행동을 토대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수많은 경험으로부터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예상합니다. 그중에서 알게 모르게 "상황이 이대로 흘러가야 해"라고 여기는 특수한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변수가 생기면 복잡하거든요. 이를 규범적 시나리오라고 부르겠습니다. 병원에 간 일반적인 상황이면, 접수처에서 온 적 있냐고 물어볼 거고 앉아 있으면 자신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규범적 시나리오가 현실과 어긋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주머니에 지갑이 있어야 하는데 버스를 타고 보니 없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규범적 시나리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어긋나는 경우는 다릅니다. 적당히 예상을 빗나가는 것은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지루함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유머란 규범적 시나리오의 의도적 파괴입니다. 첫 수업 날 학생들은 진지하고 어려운 내용을 예상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갑자기 연애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또 의도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수님은 진지하게 수업하는데 말투 때문에 웃긴 것과는 다른 것이죠.
유머는 강한 맥락의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가 어떤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는지, 그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의 파괴가 감당 가능한지 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보통 아이들보다 어른들을 웃기는 게 더 힘듭니다. 규범적 시나리오는 경험에서 나오는데, 어른들은 경험이 많아서 여러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괴를 시도했는데 그게 시나리오 중 하나였던 것이죠. 무대 위 같은 경우는 규범적이고 긴장된 자리라 시나리오가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이상한 멘트 하나만 쳐도 웃기기 쉽습니다. 또 상대가 감당 가능한 성적인 이야기의 범위가 있는데 이를 넘어서면 불쾌한 유머가 될 수 있습니다.
유머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규범적 시나리오를 어떻게 파괴하느냐입니다. 상당히 감각적이고 창의적인 영역입니다. 제일 기본적인 것은 언어유희라고 할 수 있죠.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냐." 가마니가 나오면 안 되는 규범적 상황인데 이를 파괴했습니다. 그렇다고 분위기까지 파괴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닮은 꼴 찾기도 있습니다. '안녕 자두야'의 '딸기' 이야기가 나오기 힘든 상황에서 저보고 갑자기 닮았다고 하면서 시나리오를 파괴하는 겁니다. 얼마나 닮았느냐에 따라 파괴의 질, 유머의 질은 달라지겠죠.
유머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소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종류도 굉장히 방대하고 개념도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몸 개그부터 말장난, 성대모사, 자학 개그 등등. 유머가 '규범적 시나리오의 의도적 파괴'라는 저의 주장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의 주장보다 더 탁월한 주장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 글이 유머 실력을 키우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