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스펙트럼

by 인문학도 최수민

오늘은 조금 거창하고 딱딱하고 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학문의 양대 산맥이라 하면 단연 인문학과 자연과학입니다. 이 둘은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요?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인 관계일까요? 저의 오랜 관심 주제였던 학문 자체 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를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일개 학생이 내놓는 투박한 주장이지만, 일개 학생이기 때문에 줄 수 있는 새로운 시각도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여러 학문들은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쪽 끝으로 갈수록 상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반대쪽 끝으로 갈수록 추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집니다. 상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학문이 인문학, 추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학문이 자연과학입니다. 여러 학문들을 상상과 추론의 비중에 따라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문학 - 역사학 - 철학 - 사회학 - 생물학 - 물리학 - 수학. 여러 학문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모델입니다. (모든 학문을 공부해보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주의할 것은 인문학에도 추론이, 자연과학에도 상상이 작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때로는 큰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광해군은 한때 폭군으로 여겨졌지만 여러 증거를 종합적으로 추론해서 나중에는 실리 외교를 펼친 군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로 이루어진 세계를 상상했기 때문에 이후의 과학자들이 이를 가정하고 추론과 실험을 할 수 있었고, 여러 원소와 입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어쩌면 자연과학적 경험이 인문학에, 인문학적 경험이 자연과학에 기여할 수도 있는 것이죠. 여러 학문에 기웃거리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왜 하필 상상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인문학은 인문, 즉 인간의 무늬 또는 흔적을 탐구합니다. 인간(들)의 능력을 발휘해서 얻은 모든 것을 탐구하는 것이죠. 이를 통해 인간 자체를 알아가려고 합니다. 인간은 열린 존재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존재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려면 수많은 가설, 모델을 '상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영혼삼분설이니 하는 식으로 말이죠. 대신 상상은 '나'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해리포터 같은 건 누군가의 내면세계를 반영하는 고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론은 '나'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삼단논법 같은 건 누구나 똑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이 고유한 영역을 잃지 않는 이유입니다.


자연과학은 왜 하필 추론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자연과학은 자연의 원리를 탐구합니다. 인간이 열린 존재라고 할 때 자연은 닫힌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을 움직이는 정해진 원리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런 원리는 숨겨져 있어서 인간이 알아내야 합니다. 자연현상이나 실험 결과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바탕으로 '추론'을 해야 하는 것이죠. 추론은 흔히 알려진 대로 패러다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서 빈칸의 원소를 예측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패러다임이 바뀔 때에는 상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학문의 통합을 이야기하면 흔히 통섭을 이야기합니다. 통섭은 자연과학이 인문학을 야금야금 먹어버리는 이미지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학문의 통합일까요? 아닙니다. 여러 학문이 속하는 하나의 스펙트럼을 발견하고 그것의 척도를 밝히는 것이 진정한 학문의 통합입니다. 인간의 머릿속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각각의 활동들을 모두 존중해야 합니다. 자연과학은 인문학을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상호보완 관계입니다. 자연과학은 인간이 포함된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고, 인문학은 자연을 탐구하는 인간 자신의 흔적을 탐구합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인간인 것이죠. 그래서 하나의 스펙트럼 위에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간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하고, 패러다임이 바뀌어왔다는 역사적 사실이 과학자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죠.


학문은 상상과 추론이라는 척도로 이루어진 하나의 스펙트럼입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각각 상상과 추론을 대표하면서 스펙트럼 위에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는 결국 진정한 학문의 통합을 의미합니다. 각 학문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하는 학문의 통합입니다. 스펙트럼 위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를 보완하면서 나날이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생각하는 사람들의 점잖은 비판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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