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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플로거 Jan 13. 2022

너그러운 마음으로

플로깅 스물여섯번 째 

새해가 밝고 힘찬 마음으로 쓰레기를 줍는다. 또 같은 자리에 배출일도 아닌데, 먹다 버린 치킨이 나와 있다. 배달받아 먹은 것인지 배달용 비닐봉투 안에 남은 닭다리 하나, 다 뜯어먹은 닭뼈 여러 개, 치킨 단무지, 콜라캔이 한데 섞여 있다. 매번 같은 업체의 치킨이고, 같은 요일에 버려지는 쓰레기인데, 나.는.누.가.버.렸.는.지.알.고.있.다. 


업체 상표를 지웠습니다.

닭뼈를 일반 종량제 봉투에 분류해서 버리고 캔은 재활용품 수거하시는 분들이 가져가시도록 따로 옆에다가 놓아두었다. 살점이 남아 있는 치킨은 어째야 하지? 음식물쓰레기인데 오늘은 음식물쓰레기 봉투 챙겨오는 걸 깜빡했다. 다행히 날이 차가워서 꽁꽁 얼테니까 일단 갖고 나간 비닐에 넣어두고, 내일 쓰레기배출날에 우리집 음식물쓰레기 봉투에 같이 담기로 결정. 


이리하여 오늘의 플로깅을 시작.  화내지 않는 연습을 하기 위한 정신수양 꺼리로 출발~. 



플로깅하고 며칠 되지 않았을 때인데, 비슷한 시각에 뒤엉킨 치킨 쓰레기가 있었다. 배달용 비닐봉투에 치킨을 배달시킨 사람의 주소, 휴대폰 전화번호까지 버젓이 붙어 있었다. 전화해서 정중히 배출일과 배출방법을 지켜달라고 부탁했고,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지키기가 어려운가 보다.      


휴대폰 목소리 너머의 주인공은 앞집에 사는 청소년이었다. “집에 친구들이 놀러 와서 같이 치킨을 시켜 먹었는데,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시기 전에 버리느라고 내놓았다”고 했다. 묻지 않은 이야기를 열심히 하길래 ‘이제 다시 안 그러겠지’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오늘로 네 번째로 같은 치킨 쓰레기를 치웠다.      


매주 배출일이 아닌 요일에, 같은 시각에, 같은 자리에,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치킨을 버리기도 쉽지 않을 텐데. 앞으로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계속 내놓더라도 내가 플로깅 100번 채우는 동안에는 로봇처럼 다 치워보겠다. 세상사 화를 내거나 충고 등으로 바꿀 수 있는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자신의 시각이나 태도를 먼저 바꿔야 할 일도 있다. 플로깅은 아무래도 후자에 속하는 일 같다. 바꿀 수 없는 일은 바꾸지 못함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2021년에 코로나 팬데믹의 원인과 현황, 실태와 전망 등을 짚어보는 책을 많이 읽었다. 그중 인상 깊은 책이 있었다. 정신과의 김현수의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우리가 놓치고 있던 아이들 마음 보고서>(덴스토리, 2020년 11월)란 책이다. 코로나 시대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살펴봄으로써, 어른도 스스로 마음 돌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과 타인을 대하며 대전환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들어 좋았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신과 타인을 대하며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하겠다는 깨달음을 준 책.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런 감염병 대유행 시대에, 갈 데도 없고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지도 못는 아이들. 사회적 관계도 형성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동네나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이나 유대감을 키울 경험도 박탈당한다. 더욱이 부모의 돌봄 없이 홀로(아이들끼리만)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스마트폰만 본다며 핀잔과 조롱을 듣고, 게다가 코로나로 인해 세상이 달라지고 있고 그 달라진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일들을 배워야 하는데 그것도 안 한다는 비난도 비아냥거림도 당한다. 어른도 불안하고 기진맥진하는 시대인데 많이 버겁겠지.      


“이렇게 후벼파는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의 불안과 자기비난이 거세지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아이들이 불안해지는 아주 큰 이유 중 하나는 본인이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69쪽 김현수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경험하며 버거운 성장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 왜 그런지 요 며칠간 골목에서 아이들이 먹을만한 과자 부스러기나 먹다 만 빵 조각, 군것질 포장지를 자주 본다. 그들의 쓰레기를 조바심 내지 않고 묵묵히 치워보겠다.      


치우기 전 기념삼아 한 컷.  뭐 먹음직스럽다.


오늘의 정리 

전세계적으로 오미크론 변이가 유행하고 있다. 변이에 또 변이. 이사오기 전에 살던 동네 이웃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오늘 들었다. 작년 추석 때 가족모임을 하다가 코로나에 감염되었고 상태가 악화되어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한다. 동네 주차장 일을 보셨는데, 한겨울에도 짧은 반팔 셔츠로 다니실 만큼 튼튼한 분이셨다. 서로 가볍게 인사하는 사이 정도였지만, 이웃과 그 가족의 불운이 안타깝다. 대체 언제나 팬데믹이 끝이 나려나.   

그리운 한 여름 노을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로부터 배운 것처럼, 기진맥진하지 않고 (플로깅으로) 스스로 충전되고 자각한 힘으로 일상을 유지하고 싶다.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 책 가운데 내가 강조 밑줄을 쳐둔 부분을 옮겨 적는다.      


“심각한 치료를 하기 전에 좋은 돌봄을 제공함으로써 질병에 이르지 않을 수 있고, 좋은 돌봄 이전에 당사자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이해하고 노력함으로써 당사자 스스로 충전되고 자각한 힘으로 자기 자신을 보살필 수 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15쪽 김현수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      


한겨울이 어서 지나가면 좋겠다. 하루빨리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으면 좋겠다. 신록이 푸른 여름하늘이, 아름다운 여름 저녁놀이, 그리고... 예전에 코로나가 없었을 때가 무척 그립다. 여름은 다시 오겠지만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한껏 불타오르는 겨울 노을을 바라보며 애도와 소망의 마음으로 오늘을 정리한다.      

소나기 내리는 가운데 푸르른 한 여름 신록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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