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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플로거 Jan 18. 2022

분노에 대해

플로깅 스물일곱 번째

섣달 추위가 매섭다. 인적이 줄어 쓰레기가 덜 하다. 이른 저녁 시간인데도 고요하다. 동네 골목에서 약간의 쓰레기를 줍고 옆 골목으로 이동한다. 길 한복판에 소주 한 병이 깨져 있다. 소주병 속 술이 다 쏟아진 듯 알콜 냄새가 난다. 영하 날씨니까 바닥에 금방 살얼음이 낄텐데, 보니까 아직 액체 상태이다. 아무래도 내가 여기로 플로깅 오기 직전에 뭔가 일이 벌어진 듯 싶다.    

 

길에 흩어진 소주병 조각을 줍는다. 병이 부서진 모양을 유심히 살펴본다. 사람의 손으로 냅다 땅바닥에 소주병을 내동댕이친 것 같다. 깨진 유리조각을 한데 모으니 얼추 소주 한 병 형태가 됐다. 병따개 목부분을 잡고서 바닥을 향해 힘껏 던진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소주병으로 남을 치거나 때리진 않은 것 같다. 사라진 유리조각은 없고 피자국 같은 것도 안 보인다. 소주병을 패대기쳤을 때 자기 손을 살짝 베였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겨울 길바닥에 소주병을 깼어야만 했을까.      


옆동네 길 한 복판에 깨진 소주병 한 병. 


분노는 양면적인 심리에너지 같다. ‘분노’는 분명 내적 외적 변화를 추동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사용(표출)하지 않으면 나 스스로도, 내 주변 사람들도 그 감정에 휘둘리고 질식당한다. 마치 불씨 같다. 조심조심 다루지 않으면, 폭력으로 이어지기 쉽다. 신체적 폭력이든 정신적(언어적/비언어적) 폭력이든, 자칫 스스로나 주변을 공격해 상처입힌다.     


예전에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한테서 부끄러움이나 슬픔, 두려움, 초조나 좌절감 등과 같은 감정보다, 분노가 심리적 에너지 강도가 높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맞는 말 같다. 분노는 수치, 서글픔, 불안, 공포, 절망 등등 그런 여타의 정서를 골고루 조금씩 포함하고 있되, 그런 감정을 떨치려는 변화의 의지도 담긴, 좀 특출난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정서.     


형언할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가슴 속 분노로 유리병을 깰 때 쾌감도 들었겠지. 어쩌면 그 쾌감만큼 슬픔이나 절망도 팽팽히 차올랐었을 테지. 분노를 주체못하는 그이의 눈치를 보고 움츠러들어 있을 (그이의) 가족이나 파트너, 주변 사람들의 오늘밤이 안쓰럽다. 소주병을 통째로 박살 내고서 그 유리조각을 내버려 둔 채 가버린 이. 괘씸하기도 안타깝기도 하다.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잃고 헤매는 분노가 유리를 줍는 내 손끝에 전해져 온다. 그게 누구 것인지, 어떻게 나온 것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도 분노를 원동력 삼아 살아왔기에, 모순된 감정을 껴안고서 스스로를 해하는 것인지, 타인을 해하는 것인지조차 모를 묘한 경계에 있는 그런 종류의 분노는 좀 알 것도 같다.


깨져 흩어진 소주병 유리조각을 치우고 한 컷


내가 겪는 비참함이 오직 나만 홀로 겪고 있는 것 같을 때. 그래도 자긍심으로 버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의 비참함과 접점을 찾지도 못한 때. 나의 분노는 마땅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그저 헛돌기만 한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비뚤어지면 나만큼 남들도 비참하기를 원하게 된다. 그러다 더 어둠 속으로 가면 내가 공격하기 쉬운 만만한 상대, 나보다 약자만 찾게 된다. 나의 분노를 집어삼켜 줄 먹잇감을 노린다.       


그런 세계를 선택하고 살 수도 있지만, 나도 남도 비참하지 않은 세계를 향해 분노의 방향을 돌릴 수도 있다. 남들이 존중받는 만큼 나도 존중받고, 내가 존엄하게 대접받는 만큼 남도 존엄하게 여기는 세상. 서글프고 두렵지만, 내가 겪는 고통을 다른 누가 겪고 있는지 둘러보고, 진실을 마주하고, 그게 남들도 느끼는 사회적 고통이라면 함께 바꿔나갈 길을 찾아보기. 나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다정하고 현명하게.      


조금이나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많은 변화를 이끈 힘은 마땅한 출구를 찾게 된, 용기 있는 ‘분노’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분노를 소중히 하되, 조심조심 다루고 지혜롭게 자~알 사용했으면 좋겠다. 나야 뭐 엄청나고 대단한 일이야 해본 적도 없고 그럴 깜냥도 안 되지만, 삶의 소소한 순간이나 일상에서 그런 '분노'의 불씨를 일깨우고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깨진 소주병 유리조각 포장 1


오늘의 정리 

가로등이 약간 어두워서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서 조심조심 큰 유리조각, 작은 유리조각을 주웠다. 비닐에 소주 유리병 조각을 넣고, 동네 골목서 주은 종이와 스티로폼, 뽁뽁이 등으로 감싸고 묶었다. 청소하시는 분들이 손을 베이지 않도록 유리병 조각이 움직이지 않게 꽁꽁 묶어서 종량제 봉투에 넣었다.      


아무쪼록 날 것 그대로의 ‘분노’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깨진 소주병 유리조각 포장 2

들끓어 오르는 화를 길에 고스란히 쏟아낸 그이. 소주병을 깨고 나서 분이 풀렸을까. 문제가 풀렸을까. 분노할 수 있는 힘을 소중히 여기고, 잘 다뤄서 진짜 해결책을 찾아 평온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나도 그럴 수 있기를. 삼라만상 다 이어져 있으니, 오늘 내 마음이 언젠가 그이에게 전해져 닿기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 동네 냥이가 또 반갑게 아는 척을 해준다. 귀엽다. 요새 추위로 물이 다 꽁꽁 금방 얼음이 되는 날씨라서 오갈 때 따뜻한 물을 챙겨주는데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 같다?! 넘 의인화했나? 이번 겨울 잘 버텨 줘!! 


 

"화는 소위 부정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어두움을 벗어나 빛으로 나와야 한다. 그때서야 화가 가진 힘을 선용(좋게 사용)하고, 화가 곪아서 독을 내뿜지 않게 할 수 있다. 화를 이용해 상대를 통제하거나, 벌주거나, 혹은 자신을 벌주지 마라. 또 상대가 화를 이용해 당신을 입 다물게 하거나 우울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라. 오히려 화를 이용해 힘을 끌어 모으고 결심을 강화하라.
당신과 당신이 믿는 바를 변호하라.
세상의 모든 불공정과 학대, 그리고 잔인함에 맞서 싸워라

비벌리 엔젤 지음, 김재홍 옮김 <화의 심리학Honour your anger>(2007년 한국어초판, 2003년 영어원서 초판, 마지막장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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