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깅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번째
쓰레기를 줍는다. 평상시 자주 줍는 쓰레기는 쓰다만 마스크, 아이스팩, 유리조각, 플라스틱 조각, 음료(커피 등) 플라스틱 컵용기, 건전지, 컵라면이나 비빔면 용기, 담배갑, 꽁초 등등이다. 주워도 주워도 끝없이 버려져 있으므로, 적당한 선에서 포기할 줄 알아야 하루하루 지속가능한 플로깅을 할 수 있다.
그밖에 특이한 쓰레기를 볼 때면 우습고 좀 놀랍다. 평상시 보는 쓰레기와 마찬가지로 역시, 배출마대나 봉투에 넣지 않고, 배출날짜도 안 지키고 버려진 것들이다. 그나마 쓰레기터 근처에 버려져 있을 땐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오늘은 특이한 쓰레기랄까, 시대상을 반영한 쓰레기를 기록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강아지 대변
엊그제 대형견의 대변(대변량이 많아서 대형견의 것일 것으로 추측. 설마 사람 대변은 아니겠지?)을 보고서 엄청 웃었다. 추운날 쓰레기터 전봇대 구석에 꽁꽁 딱딱하게 정육면체로 얼어붙어 있었다. 저번에 유명한 훈련사가 하는 이야기를 TV서 들었는데, 강아지를 산책시키면서 강아지가 변을 봐도 변을 본 줄 진짜로 모르는 견주가 많다고 한다. 견주의 정신이 다른 데 팔려서인데, 그 훈련사는 제발 산책 시 자신의 반려견에 좀 집중하라고 충고했다.
플로깅하면서 내가 강아지 대변을 치운 건 여태까지 한 세 번 정도인데, 다 물컹물컹한 변이었다. 이상한 것이, 평소의 대변 상태라면 치우겠는데, 꽁꽁 언 정육면체 대변은 도저히 치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혹시나 기생충 등 감염 우려는 얼어버린 대변(냉동의 고체 상태)이 덜할 터이니, 내가 봐도 좀 비과학적인 취사선택이긴 하다.
인식의 괴리 탓인가? 인지부조화? 내 머리속에 개똥이라 정의한 바(고체+액체 상태)와 불일치가 심해서, 반감이 들었다. 살펴보기만 하고 그냥 내버려 뒀다.
다음날 날이 풀려서 강아지 대변이 해동됐겠거니 싶어서 그 자리에 가보니까, 환경미화원 분이 치운 것인지 아니면 견주가 와서 보고 뒤늦게라도 치운 건가?
어쨌든 아싸라비아. 캄사캄사합니다!
반려견 키우는 인구가 코로나 이후 급격히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여태까지 약 서른 번에 달하는 나의 동네 플로깅에서 강아지 대변은 그리 많이 보지 않은 듯 하다. 다만 강아지 방석, 강아지 이동 캐리어, 강아지 계단(견주 침대까지 스텝을 밟아 오르게 하는 쿠션) 등은 심심치않게 목격한다. 전부 배출봉투에 넣지 않고 그냥 쓰레기 더미 위에, 혹은 헌옷수거함 옆에 내다버린 것들이었다.
이런 걸 보고 있으면, 코로나가 종식되면 얼마나 많은 반려견이 버려질지 걱정이 된다. 물론 당연히 모든 반려인들이 이렇게 매너없지는 않다. 반려인을 싸잡아서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며, 부디 지나친 염려라면 좋겠다. 반려견 존재가 소중하다면 체취가 묻은 쓰레기를 이토록 함부로 막 버릴 수는 없을 듯 싶어서 좀 걱정된 것일뿐이다. 코로나 전에도 휴가지 혹은 출장으로 간 지역 여기저기에서 버려진 강아지를 정말 많이 보았다.....
으레 배출일을 지키지 않는 소형가전
소형가전. 체중계, 전기밥솥, 소형세탁기 소형탈수기(전자레인지 사이즈만 했음), 정수기, 전기장판, 무선청소기 등등. 특히 무선청소기와 체중계는 여러 번 봤다. 물론 현재 소형가전은 지자체에서 무상으로(서울의 경우 5개 품목까지) 수거해주니까, 배출료 등을 물지 않고서도 내놓을 수는 있는데, 배출일을 지켜서 내놓은 소형가전을 별로 못 본 것 같다. 이 점이 특이하다.
왜 유독 소형가전을 버릴 때면 사람들이 배출요일을 안 지키는 걸까? 아마도 어려운 분들이 재활용을 해가라고 하는 듯 하다. 그런데 내가 관찰한 실상을 보면, 배출요일을 안 지키고 나온 소형가전 근처로 금세 쓰레기가 몰리고 쌓인다. 소형가전이 잘 안 보여서 바로 수거되지 못할뿐더러, 가져가서 쓰는 사람도 못 봤다.
쉽게 사고 쉽게 버리고,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 가운데서
솔직히, 나는 물건을 좋아한다. 일상용품에서 신기한 물건, 숨겨진 아이디어나 창의성를 찾아볼 수 있는 새로운 발명품, 재활용할 수 있는 물건부터 실용적 용도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물건, 이제는 버려도 좋을만큼 오래된 물건에 이르기까지. 환경에 관심은 지대할지언정, 물건 사랑을 끊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냐면. 심지어 플로깅하며 쓰레기를 주우면서도 이 물건 저 물건 보는 와중에 소형가전을 보는 건 좀 신났다.
환경을 위해서라면 되도록 적게 사고 적게 소비하고 미니멀리즘을 실현하는 게 맞다. 전기를 되도록 안 쓰거나 아주 절약해서 지구에 해를 안 끼치고 사는 분들에 대해 깊이 존경심도 갖고 있다. 그런 삶의 방식이 가치 있고 흥미로우며, 앞으로 시대적 지표가 될 것으로 믿는다.
석탄화력이나 원전 등에서 주로 발전되는 전기는 송전손실이 크므로, 나도 전기를 아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다. 외출 시 냉장고와 전기밥솥을 제외한 모든 전원의 코드를 뽑아서 대기전력을 줄이고 있다. (바쁜 외출 준비 때 집안을 뛰어다니며 휘리릭 코드를 하나하나 뽑을 때 느껴지는 독특한 쾌감? 재미?가 있다.) 인덕션도 가급적 안 쓰려 한다. 가스(도시가스)는 요리 때 가스연소과정에서 유해물질이 나오니까 환기를 하거나 후드를 틀어야 하긴 하지만, 인덕션은 에너지 형태가 변하는 열-전기-열 변환과정에서 에너지 손실 많다.
그런데 위와 같은 절전 노력에 반해, 물건 끊기가 내게 만만치가 않다. 물건에 중독(의존)된 탓에 올바른 생활방식을 실천하기가 결코 수월하지 않다.
범용성을 가진 물건(물건 하나로 여러 쓰임새가 있는 것)만 사서 쓰자고 과거에 여러 차례 결심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독하게 마음먹고 다이*로 향하는 발길을 끊기도 하고 전자제품비교사이트 다나*도 안 들어가려고 애를 쓰고, 중고 당**켓 앱마저 지웠건만. 스트레스를 받는 날에는 자주 불요불급한 물건을 사고, 참고 있다가도 물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누가 쓰다준 물건이 십년 이십년이 지났어도, 잘 버리지 못해서 애착심으로 갖고 산다. 전에 이사할 때 한 번 마음 단단히 먹고 정리를 했다. 매우 큰 결심이 필요했고 큰일 치룬 느낌인데, 에구머니 정신을 퍼뜩 차려보면 집안에 다시 물건이 늘어나 있다.....
결국 지금 나는 청소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넓은 집에서 편리한 용품은 죄다 갖추고 살고 있다. 그렇게 살기를 원했고, 지금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삶으로 그럭저럭 행복과 성취감,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가끔 꺼림칙하다.
원전사고가 났다든지, 원전이 가동을 급히 중지했다는 종류의 소식을 들을 때가 그렇고. 요새는 미세먼지가 심한 날. 뒤가 켕긴다. 세계의 공장에서 싸고 값싼 물건(디젤 가솔린 등 내연기관 있는 자동차 포함)을 공급하는 것은 그걸 찾아 쓰려는, 또는 그냥 소유하려는, 소비자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욕만 할 게 아니다. 나도 끊임없는 물건 소비라는 행위로서, 공장을 계속 돌려 인체에 해가 되는 미세먼지를 만들어내는 것에 가담하고 있다. 원전이든 미세먼지든 몸이 약한 사람들부터 건강에 타격을 받게끔 한다는 것이 때로 무척 찔린다. 원전에서 나오는 고준위 저준위 방사성폐기물이야말로 시대를 반영한 대표적 쓰레기이다.
재작년 겨울에 깜찍한 디자인의 소형 전기온풍기를, 그것도 소비전력이 낮은 고효율의 제품을, 싸게 샀다.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던 매우 싼 가격이었다. 배송되던 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옆에 놓고 그저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무색하게도, 올겨울에는 꺼내서 쓰지 않고 있다. 우선 지난봄에 먼지가 안 들어가게 싸매놓은 걸 푸는 게 귀찮다. 결정적 이유는, 굳이 그 소형 전기온풍기를 안 샀어도, 이미 내게는 난방용품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행복.
‘뭐 어때 경기부양도 소비로 하는데, 나도 좀 스트레스 좀 풀어야지.’하면서 이런 모순을 껴안은 채로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고, 시대를? 사회를? 나를? 비판하며 이러고서 기록을 하고 있다.
정리하며
‘아, 물건 사랑을 줄이자!’하고 결심하고 오늘 결론을 한 줄 쓴다.
막상 쓰고 보니, 왜 이리 스스로 거부감이 들지. ㅋㅋ 나의 진심이 아니어서이겠지....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얼마 전 산문집 개정판을 낸 최승자 시인의 시 ‘즐거운 일기’(1984년작). 플로깅 서른번째 날, 주워도 주워도 끝없는 쓰레기들을 떠올리고 헤어날 수 없는 나의 물건 사랑을 마주하고, 이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이 퍼뜩 생각났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1990년대 초반)에 시 '즐거운 일기'를 알게 됐는데, 왠지 모를 전율을 느꼈었다. 부모, 학교샘, 친구 등등 주변 모두가 서울에 아파트 한 채 마련해서 도시중산층 소시민(쁘띠부르조아? ㅎㅎ)으로 사는 걸 이상적인 삶으로 보고 내게도 그런 삶을 강요한다고 느끼며, 나도 그런 삶을 원하나 하고서 갈피를 못 잡던 시절. 제대로 나를 한 방 엿 먹인, 멋진 시다.
한 방 잘 먹었는데도, 내가 아직도 전형적인 근대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좀 느낀다. 권력에 관한 현대사회학 이론 가운데 가장 참신한 이론이 푸코의 '미시권력'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권력자가 강압이나 카리스마 등을 동원하지 않아도, 지배를 받는 피권력자가 스스로 동의하여 내면화하고, 일상에서 실천을 통해 다시 생산해내는 권력. 이런 권력으로 이뤄진 생활세계에서, 모순을 안고서든 뭐든간에 성찰하면서, 아무튼 플로깅 100번을 향해 가보겠다.
오래간만에 다시 시를 찾아서 읽어봤다.
즐거운 일기
최승자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 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 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 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1984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