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깅 51번째
동네쓰레기터에서 허리를 굽혀 쓰레기 몇몇 개를 줍고 있는데, 행인이 내 머리 위로 택배 박스를 휙 던진다. 내용물을 꺼내고 난 후에 버린 아주 가벼운 박스. 그 날은 쓰레기배출일이 아니어서 나는 "이렇게 던져놓고 가면 여기에 쓰레기가 자연스레 쌓이게 되고 배출일이 내일이니까 내일 버리세요"라 말했다.
행인은 “아니, 여기다 두면 폐지 줍는 할머니가 알아서 금방 다 가져가는데요. 나는 좋은 일 하는 거예요”라 하고 박스를 버려두고 갔다.
2022년 4월 수도권에서 현재 골판지 폐지 가격 1kg 138원. 10kg 모아봐야 1380원. 생업으로 일을 하는 마당에, 고작 얇고 가벼운 박스 하나를 줍기 위해 쓰레기배출일이 아닌 날에 동네를 돌아다니는 어르신은 거의 보질 못했다. 배출일이 되면 그 전날(주말을 지난 월욜이나 화욜이면 그 전전날)부터 쌓인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재활용품 골라내는 것도 품이 들 터.
잠자코 생각해보니 행인의 사고방식이 예전의 나와 비슷하다.
휴일에 집 청소를 했다. 지난 5개월 동안 플로깅 50번을 하면서 집으로 갖고 온 물건들이 늘었다. 이것저것 쓰레기를 줍다가 왠지 아깝게 느껴져서 나름대로 내가 활용해보려고 가져온 것들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집어온 것임이 분명할진대, 정신차리고 보니 어느새 베란다가 포화상태다.
쓸만하게 보여서 주워 온 옷걸이는 막상 부러져서 못 쓰게 된 것이었다. 밤에 플로깅할 때 가져온 것이라 옷걸이 고리 부분이 부러져 있는 줄 미처 몰랐다.
조그맣고 검은 자석이 붙어 있는 음식점 메뉴판 홍보물도 여러 개 집어왔다. 역시 플로깅 하다가 주운 것들인데 당장 분리수거법을 모르기도 하고 자석을 모아서 뭐라도 해볼까 싶어서 일단 집으로 갖고 왔었다. 자석 재활용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이제야 분리수거법을 찾아보니, 자석이 붙어 있는 채로 종량제 봉투에 넣으라고 나와 있다. 아, 자석도 일반쓰레기로 종량제 봉투에 다 같이 버리는구나.
엥? 진짜? 이렇게 자석도 다 종량제 봉투에 넣어도 될까 싶어 찾아보니, 쓰레기 수거 후에 금속 성분 쓰레기를 자석에 붙여 분리해내는 과정이 있는데, 그때 이런 조그만 자석도 붙어서 분리되는 듯하다. '음, 다행이네' 하다가 뭔가 찜찜해서 한 번 더 찾아보니, 수도권 쓰레기매립지 마을에서는 흙을 채취하면 쇳가루가 나온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한 주민이 심한 아토피를 앓고 있다는 뉴스.
서울시에는 쓰레기매립지가 단 한 곳도 없으니, 서울이 이 마을에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내가 사는 곳 가까이 매립지가 있어야 어떻게든 쓰레기를 줄이려고 노력할 텐데. 마을 이름조차 이렇게 검색해서 비로소 알게 된다.
십년 전 2012년 아파트 35층 높이의 고압 송전탑을 세우는 것에 항의해 밀양의 어르신이 분신자살한 사건의 발단은 바닷가 근처에서 원자력 발전한 전기를, 전기를 많이 쓰는 서울로 송전하기 위함이었다. 지역의 희생을 밟고 선 서울에서 내가 혜택을 입고서 어제를 살아왔고 오늘을 살고 있다. 그래도 내일은 이렇게 안 살고 싶다.
추운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듯한 거대한 눈더미처럼 하얗게 쌓인 스티로폼 더미 속에서, 스티로폼도 집어 왔었다. 스티로폼이 왜 이리 많아. 대체 언제 집어온 거니. 스스로 되묻고 있다.^^ 지난 겨울에 봄이 되면 베란다 텃밭을 해보려고 하나둘씩 갖고 왔는데, 쭉 미루거나 잊고 있었다.
가지, 고추 모종을 사 와서 스티로폼에 흙을 넣고 심었다. 동네 화단에 심은 맨드라미 씨가 싹이 별로 안 트는 것을 보니까, 싹부터 틔우기가 자신이 없다. 스티로폼은 물이 잘 빠져 좋다.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쓰레기를 쌓아놓은 것인가
우리 동네에 쓰레기가 집 안팎으로 넘쳐나는 '쓰레기집'이 몇 군데 있다. 내 베란다를 정리하면서 ‘호더’ 혹은 ‘저장강박증’ 등으로 불리며 지탄 혹은 도움을 받는 어르신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집을 만들어놓고 사시는 분들은 대개 생업으로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이다.
악취를 풍기는 볼썽사나운 미관, 화재 우려 등으로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것도, 그리고 당신 자신이 정신적 어려움을 크게 겪고 계신 것도 분명하니, 복지 차원에서 이 어르신들의 넘쳐나는 쓰레기 집 청소, 각종 심리 지원 등 도움을 드려야 하는 것은 맞는데.
이분들이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쓰레기를 집 안팎에 쌓아놓아서 주위로부터 비난받고 동시에 도움받아야 할 ‘호더’가 되고 말았는가? 플로깅을 하면서 나도 베란다에 쓰레기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보니까 그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수동, 능동 그 뭣도 아닌
세상에는 수동도 능동도 아닌 그 중간 쯤에 위치한 상태의 행위가 있다. 언어학에서는 이를 중동태라 한다. 고대 인도유럽어족인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아베스타어(조로아스터교 경전에 사용된 언어)에 공통적인 중동태 동사로는 “태어나다, 죽다, 따라가다, 이어오다, 고향에 돌아오다, 누리다, 자고 있다, 앉아 있다, 겪다, 참고 견디다, 고생하다, 마음이 동요하다, 염려하다, 이야기하다” 등이 있다. (프랑스 언어학자 에밀 뱅베니스트Émile Benveniste의 분류에 따른 것임. <중동태의 세계–의지와 책임의 고고학>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박성관 옮김, 동아시아, 2019년. 103~105쪽)
스페인어 재귀동사도 중동태 중 하나라 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는데, 쉽게 말해 중동태에서는 주어가 (행위를 하는) 과정의 내부에 있다. 주어로부터 출발하여 주어 바깥에서 완수되는 그 무엇. 하는 것(능동)도 당하는 것(수동)도 아니니까, 어떤 행위에 있어서 주체의 자유의지나 책임을 묻는 것, 자발이냐 강제냐를 따지는 것이 불분명해질 수밖에 없다.
애매하긴 한데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다. 뱅베니스트는 “언어를 모르고서는 존재의 자리를 제대로 가진 인간을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마지막 강의, 천재 언어학자 뱅베니스트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1968~1969)> 에밀 뱅베니스트 지음, 김현권 옮김, 그린비, 2021년. 176쪽) 인간의 경험을 드러내며 밝혀주는 것이 언어니까.
강제당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자발적인 것은 아닌, 자발적인 것은 아닌데 동의는 했고. 그런 모호한 중동태 영역의 경험이 일상에 꽤 있는 것 같다. 내 직감으로 느끼기에는, 쓰레기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중동태의 영역이 아닐까 싶다.
우리말뿐만 아니라 대다수 현대어에는 중동태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경험의 영역이 있을 것이다. 가령 '낫는다'는 경험. 우리가 아파서 의료를 받고 회복하는 것처럼 보편적으로 누구나 경험하는 것. 나은 것은 분명 나인데 스스로 나았나, 의료처치를 받고 나았나.
아니면 '자해'와 같은 보다 덜 보편적인 행위. ‘쓰레기집’은 쓰레기집에 거주하는 이 즉 당사자가 가장 힘들고 불편할 것이란 측면에서 일종의 자해와 같다고도 할 것이다. 자해에는 학대나 폭력(가난이나 차별과 같은 구조적 폭력 포함)등의 배경이 자리잡고 있거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내가 나 스스로 나를 해하는데 나를 해한 주체는 진짜 나인가. 나를 해하는 주체는 지금 여기 현재의 나인가. 아니면 나와 이어진 과거 고통 속에 신음하던 나인가 혹은 내게 고통을 가하던 사람인가. 혹은 인간의 얼굴(정확히 하자면 사회적 관계) 뒤에 숨어있는 구조(사회구조)인가?
혼돈스러운 중동태 영역의 경험에 대한 사고를 심화시킨다면, 언젠가 인간 모두에게 적용해볼 수 있을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사상을 낳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병을 크게 앓거나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 학대나 폭력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수기, 논고를 읽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늘의 정리
폐지 줍는 노인 실태조사, 인터뷰 등를 보면 한국사회의 빈곤연구에서 밝혀온 결과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한국에서 가난은 대부분 생애사적 가난이다. 가난하게 태어나고 자란 이가 교육기회를 얻지 못해 소득을 넉넉히 얻거나 그 소득을 보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생애 전체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질병이나 실업을 겪고 한 순간에 더 빈곤으로 빠지게 되며, 특히 노년기에 빈곤이 심화된다. 젊어서 일용소득이 높을 때는 잠깐 나아지긴 하지만 그것이 계급적,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코로나 이후 폐지 줍는 노인 관련 실태조사가 아예 없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코로나 이후 폐지 줍는 어르신들이 확실히 늘어난 것 같다. 그만큼 어르신들 간에 경쟁도 심해서 속도전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 많다. 참고로 코로나 발생 이전 해 즈음 실시된 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폐지 줍는 노인의 성비는 기존 여자6:남자4에서 5:5정도가 됐고, 비교적 젊은 고령자(75살 이하)도 꽤 일하고 있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중 가장 높은 노인빈곤율은 귀가 따갑도록 반복적으로 나오는 뉴스니까 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한국의 노인인구 중 47%만 국민연금, 주택연금을 받는다. 노년층이 보편적으로 받는 기초(노령)연금은 2014년부터 시작되어 액수도 대상도 확대되어 왔다. (현재 소득하위 70%에게 매달 최대 30만원 정도) 그 덕에 현재 노인빈곤율이 30%까지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가야할 길이 멀다.
올초에 한 지자체에서 폐지와 재활용품을 줍는 노인들이 연달아 차에 치여서 숨지면서, 대책으로 안전장비 지급과 안전교육 등을 실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조례가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한다. 그 뉴스를 듣고선 나도 구청에 우리 동네 어르신들께 안전장비 지급이나 안전교육 등이 가능한지 물어봤는데, 조례를 만들어야 해서 빨라도 내년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절차는 지켜야겠지만, 쇼핑몰 찾아보니 형광 안전 조끼 하나에 5천원밖에 안 하는데 이런 형광 안전조끼를 지급하면서, 간단하게나마 안전교육 등을 하면 좋을텐데. 아무래도 행정이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여력이 없나 싶기도 한데. 아니 애초에 안전장비 지급이나 안전교육보다도 싸디싼 폐지 가격을 파격적으로 올리거나, 아니 무엇보다 노인빈곤율을 떨어뜨리는 게 우선순위겠지 싶기도 하다.
이토록 쓰레기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먹고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자신을 둘러싼 물적 정신적 토대로 인해, 끝없이 쏟아지는 쓰레기와 무한정 거리가 가까이 좁혀지면서 '호더'가 되어 '쓰레기집'을 만든 어르신들의 경험. 아직 사유하지 않고, 이야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쓰레기집'은 쓰레기집을 만든 사람만의 책임이고, ‘호더’ 어르신들은 나만 못한 사람이고, 당장 치료받아야 할 존재인가? 값싼 에너지를 마구 써서 막대한 양의 물건을 만들어 빨리 소비하고 버리는 과정에서 막대한 이윤을 거두거나 혜택을 보는 이들보다 먼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사고의 위험성을 내재하고 10만년이나 처리해야하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을 배출하며, 저선량 방사능에도 얼마든지 위해를 입을 우려가 있는 건강약자 또 빛나고 멋진 도시로 보내기 위한 전력을 위해 삶의 터전인 땅을 수용당해 자신의 몸을 불살라 대항할 수밖에 없던 사람을 뒤로 한채, 오늘도 발전되고 있는 원자력 에너지. 이런 에너지에 대해 무조건 안전하고 싸고 좋다며 호도하는 이들보다 먼저?
풍요 속에서 살면서 박스 하나 내놓고 좋은 일 한다고 여기고, 때로 ‘쓰레기집’의 지저분함과 몰상식함에 치를 떨고, 때로 이 쓰레기 저 쓰레기 떨어져 있어서 한눈에 척 보기에도 청결한 부자 동네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풍경을 대하며 한숨 쉬는, 그런 나와 우리보다 먼저?
+이 글은 <중동태의 세계> 옮긴이 박성관님의 옮긴이의 말에 적힌 다음 물음 중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중동태를 소환하여 사회 현상이나 의료 현장에 적극적으로 비추어본다면, 사건과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현상하기 시작할까? 사회과학이나 의료현장에는 어떤 혁신이 일어날까?"<중동태의 세계> 370쪽)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행위로 옮길 수 있고, 그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능동적 주체’인 인간상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싶으신 분들은 정창조님께서 2020년 4월에 쓴 <중동태의 세계>에 대한 좋은 서평 <온전하지 않은 이들의 자유를 위하여>을 읽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4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