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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플로거 May 11. 2022

도약

플로깅 52번째 

지난 연휴. 저녁을 먹고, 일 관련으로 봐야 해서 새 정부가 내놓은 110대 국정과제 파일을 다운 받았다. 연휴라 나른하기도 해서 건성으로 파일을 다운 받았는지 열고보니, 지난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 파일이다. 여가부 장관 후보자가 여가부 폐지에 동의하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생각하다가 잠깐 정신이 혼미했나 보다? 다시 파일을 내려받고.  


에너지 정책을 키워드로 먼저 찾아본다. ‘탈원전 정책 폐기’ 공약대로군. 옆 소제목을 읽는다. ‘원자력산업 생태계 강화’ 엥? 원자력산업으로 생태계를 강화한다고? 뭔 소리야? 


아, 원자력산업 및 관련업계 부흥시키겠단 뜻이군. 그나저나 생태계란 단어 남용 쫌 안 할 수 없나. 게임 생태계, 클라우드 생태계, 메타버스 생태계, 코인 생태계, 원전 생태계 등등.. 얼마든지 대체어가 있는데 여기도 쓰고 저기도 쓰고. 생태계가 진짜 소중한 거 맞아?  


SMR, NDC 이런 영어 약자 좀 한국말로 풀어쓰거나 옆에 쓰면 안 되나? R&D야 연구개발이란 뜻으로 많이 쓰니까 그렇다쳐도 SMR 소형원자로, NDC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이런 것은 얼마든 써줄 수 있지 않나? 추상적인 논의가 필요한 인문학이나 전문용어가 들어가는 기술논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책과제를 소개하는 글이니까, 이미 아는 사람만 알도록 쓰면 안 될 것 같은데?   


110대 국정과제 중에서 


‘원전 최강국 도약’ 2030년까지 원전 10기를 수출한다는 게 새 정부의 목표인데. 세계적 원전 기업 프랑스 아레바도 핀란드서 원전 짓다가 공사가 지연되면서 사업 부분이 쪼개지는 위기를 맞아 사명을 바꾸고 원자로 해체 사업을 한다. 전세계 원전의 반을 다 지었다는 미국 웨스팅하우스도 2017년 미 연방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한 바 있다. 


탈원전 폐기에 나는 일체 동의한 바 없으므로, 궁시렁 궁시렁 대며 읽다가 파일을 닫는다. 에잇, 밖에 나가서 쓰레기를 줍자. 나 자신이 도약하자.   




골목길. 어라? 여기서 깨진 형광등 줍고서 쓰레기아트 하며 놀고 그런지 얼마 안 됐는데, 형광등 또 나와 있네. 저렇게 놓여 있다가는 전처럼 또 박살날 게 뻔하다. 


형광등을 줍고, 옆에 6v 정도 되려나 도톰한 건전지도 줍줍. 폐형광등, 건전지 수거함이 있는 주민센터 주차장으로.  

             이렇게 버려진 형광등(왼쪽 사진)을 주민센터 형광등 수거함(오른쪽 사진)으로


형광등, 건전지에는 수은이 들어 있어서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지난 번에 <쓰레기 아트 프로젝트 1>란 제목의 글에서 썼는데, 수은과 관련해서는 2017년 유엔환경계획에서 '미나마타 협약(수은에 관한 미나마타 협약)'을 발효했다. 한국도 이 협약을 비준하면서 2020년부터 수은 함량이 높은 형광등은 제조,수입,수출이 금지되었다. 


'미나마타 협약'은 단일 화학물질을 관리하는 세계 최초의 협약이니까, 앞으로도 유해한 화학물질을 세계적으로 관리할 협약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그날이여 속히 오라! 참고로 특별히 독성이 높은 무기화학물질은 수은 외에도 크롬, 니켈, 비소, 카드뮴, 베릴륨, 납과 같은 금속 7개가 있다. 


출처: '내손안의 분리배출' 앱




집으로 곧장 안 돌아오고 부처님 오신 날 무렵이면 어김없이 작년까지 연등이 내걸린 동네 시장 골목까지 간다. 담배꽁초랑 마스크 몇 개, 더러 불법 사채 광고 명함을 줍는다. 날이 풀려서 그런지 음료수 페트병 쓰레기도 여기저기 좀 굴러 다닌다. 이제 이 골목에는 더 이상 연등이 내걸리지 않는다. 


불자는 아닌데 왠지 서운하고 쓸쓸하다. 그간 시장 건물에 있는 작은 사찰에서 연등을 걸었는데, 올해 초 재개발로 사찰이 이사 나가서 연등을 걸어줄 이가 없다. 이 시장 건물은 1970년대에 지어져서 몇 년 전부터 재개발 소리가 나오긴 했는데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상복합건물 짓는다고 해서 올초 세입자 상인들이 다 나오게 됐다. 

      

자주 가는 가게 사장님께 듣기로는, 이십 년 넘게 시장서 장사하다가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에 따라 지급받은 석달치 임대료에, 이사비로 한달치 임대료를 더 받고 나왔다고. 


이십 여년의 세월. 240개월 남짓 임대료를 지불하고, 땀흘려 일함으로써 건물을 쓰임새 있게 사용하고 유지해온 바 있는데 재개발을 해야 하니까 넉달치 임대료를 받고 나간다. 단골 가게 사장님은 시장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인근 다른 건물에 세를 들어가서 또 하루하루 장사하고 계신다. 안식월 하다못해 안식주 같은 그런 휴가도 없이 곧바로 새로 얻은 터에서 열심히 일하신다. 사장님 내외는 연세가 일흔 가까이 되셨는데 내가 알기로 일주일에 딱 하루 쉰다.     

 

이것이 비극적인 용산 참사(2009년) 이후 우리가 도달한 한국식 도시개발의 단면일까.

2021년 풍경 사진. 이제는 연등이 없는 시장 골목. 시장 건물에는 재개발 예정이라 출입을 금한다는 표지판만.


몇 년 전 초등학생 장래희망 설문 때 건물주라는 답이 많이 나왔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이에 대해 개탄하는 목소리가 나왔을 무렵, 어느 블로그에서 '왜 아이가 건물주 꿈 꾸면 안 되느냐. 건물주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어야 도시가 더 발전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다'고 쓴 글을 봤다. 꿈을 안 꿔도,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이미 증여 등으로 건물주가 된 초등학생 아이들도 있어서인지 별로 큰 공감은 안 됐다. 자산불평등이 점점 더 벌어지고 있어서 지금 초등학생들이 건물주를 꿈꾸더라도 아마도 이룰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 꿈은 그냥 어른의 희망사항을 반영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그나저나 모두가 다 건물주면 그럼 세입자는 누가 하나? 세입자가 있어야 건물주도 있는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누군들 낮은 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 불안한 노후가 싫지 않으랴. 또 한편으로는 도시가 '지속가능하게' 발전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좀 더 다른 방식으로, 가령 에너지를 아끼는 설계의 건물을 기획하며 짓고, 세입자등과의 관계도 좀 더 노력하는 건물주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 그런데 뭐 꼭 생태적 건물까지 안 지어도 그냥 지금까지 관행대로 해오는 것 이를테면 '갑질'과 다른 말과 행동 그런 것 하나에 혁신성이 깃들어있지 않겠는가. 


코로나 위기 때 어려움을 겪는 세입자 소상공인에게 임대비를 깎아주는 임대인을 '착한 건물주'라 부르기도 했는데, 내가 아는 상가건물 건물주 한 분도 석달치 임대료를 안 받았다. 이 건물주는 평소에 특이하게도, 상가건물 1층 화장실을 이른 아침부터 늦은 시각까지 개방해놓는다. 본인이 외출 시에 화장실에 자주 가는 편인데 급할 때 여기저기 건물 들어가면 다 잠겨 있어서 불편한 까닭에, 자기 소유 건물에서는 지나가다가 용변이 급한 사람이 편하게 화장실을 이용하면 좋겠다 싶었다고. 그래서 화장실 청소하시는 분한테 사례금을 더 지불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 역동성의 원천은 혁신적 기업가 정신에 의한 창조적 파괴에서 나온다며 그 원동력을 꿰뚫어 본 식견이 있는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 1883∼1950년)는 일찌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공의 열매가 아니라 성공 자체를 얻기 위해 성공하려는 충동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거기에는 일을 성공시켰다거나 자신의 에너지와 상상력을 행사했다는 창조의 기쁨이 있다. (중략) 여기에는 자본가의 축적에 동기를 부여하는 사회적 인정에 대한 욕구가 없다”     

(로버트 L 하일브로너 지음, 장상환 옮김 《세속의 철학자들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의 생애, 시대와 아이디어》 이마고출판사, 2008년. 393쪽. 슘페터가 1911년 저작《경제발전의 이론》에서 쓴 문장의 인용문)               


위의 마지막 문장을 쉽게 풀어보면, 혁신적 기업가 정신을 갖고 있다면 자본을 축적하여서 사회적 인정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슘페터가 주장한 바, 혁신적인 기업가 정신을 가진 이는 이윤의 생산자이긴 해도 반드시 이윤의 수취자(받아가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이런 시각이 좀 재밌다. 


오늘의 정리 

요즘 나는 재개발 열풍이 불던 2000년대로, 원전 산업에 박차를 가하던 70, 80년대 개발주의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다. 살아본 시대랑 분위기와 비슷해서인지 별로 흥이 안 나는데 타임머신 공짜로 탄 기분이랄까. 그래도 플로깅하며 여기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도, 진짜 생태계를 만나며 기록한 브런치 글을 보는 것도 꽤 재밌다.


더 나은 세상을 희망하게끔 하는 유혹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사람이(사람이라면^^) 이런 유혹을 다 이겨내며 떨치고 살기도 보통 만만치 않은 일인 듯 하다. 첫번째 유혹은 자신의 상황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아픔을 돌아보고 조금이나마 좋게 바꾸고 싶다고 마음 먹게 하는 그런 종류의 유혹. 현혹^^되면, 자신이 겪은 일 또는 상처를 성찰하거나 좀 더 이야기하고 싶어하거나 사회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하게 되는 것 같고, 그럼으로써 세상에(남에게도) 둘도 없이 소중한 용기를 주는 것 같다. 


두번째 유혹은 자기의 처지와 아무 관련이 없어도 어려움에 처해 애쓰고 있는 남의 입장이나 처지를 헤아리게 되는 마음. (이를 두고 전통적인 사회학에서는 '사회운동론'과 같은 이론화 작업으로 연구해왔으며, 최신 사회학, 심리학에서는 보다 더 정교한 연구가 나오고 있다.) 이런 마음에 대해 나는 일단 '지적이며 상호적인 상상력'이라 이름붙이고 싶다. 


오늘도 이런 유혹을 떨치지 못한 모든 분들께, 역사의 진보에 관한 발터 벤야민의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칩니다. 


"역사의 천사는 얼굴을 과거로 향하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자신을 향해 등 돌린 미래를 향해 날아간다."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 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길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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