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깅 64번째
1995년 8월 말 서울. 덜덜대는 버스 안이 덥다. 두 달 간 일하던 옷 가게에 찾아가 밀린 월급을 달라고 하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고, 아직 월급 못 받았었구나. 나는 몰랐네. 집에 가 있으면 울 오빠가 꼭 연락할 거야.” 사장님 대신 가게를 보고 있던 사장님 여동생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안심하면서도, 나는 이제 달랑 갈아탈 버스비만 남은 지갑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기상 관측 이래 최악의 폭염이라는 1994년 여름, 서울 변두리 옷 가게에서 알바를 했다. 경험도 없고 말도 없고 말주변도 없고 그래서 채용이 될까 싶었는데, 다행히 합격을 했다. 사장님이 동대문에서 옷을 도매로 사오면, 내가 소매로 팔았다.
일하는 첫날, 사장님이 가격표 붙이는 기계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내가 이미 가격표 붙여놓은 옷 보고, 도매로 들여온 옷에 네가 대충 가격 정해서 붙이면 돼. 쉽지? 시간 나면 한 번씩 쇼윈도우 마네킹 옷 갈아입히면 되고. 점심은 요 앞 상가 백반집에서 배달해줄 거야.” 사장님이 도매로 옷을 부지런히 들여놓을 때는 손님이 무척 많았다. 비교적 저렴한 평상복 위주로 판매하는 가게였는데 손님들이 사려는 옷을 한번 입어보면 바지단을 접어주거나 맞는 사이즈를 찾아주었다.
거의 매일 가게에서 나 혼자 일을 했다. 사장님은 옷 가게 말고 다른 일도 하기 때문에 거의 옷 가게로 나오지 않았고 가끔 매상을 수금하러 오셨다. 점심까지 챙겨주는 좋은 사장님이었지만, 오전 10시부터 저녁 9시까지 혼자 일을 해서인지 점심을 먹고 나서 손님이 딱 끊기는 한낮 즈음에는 어김없이 잠이 밀려왔다. 가게에 에어컨이 없어서 몹시 더웠다.
몇 번인가 판매 데스크에서 꾸벅꾸벅 졸았다.ㅎㅎ 옷 판매 말고도 다른 수익을 내려고 사장님은 가게 데스크 한켠에 담배를 갖다 놓아서 나는 담배도 팔았는데, 점심때면 매번 박하 담배를 찾는 손님이 왔다. 그때를 기점으로 잠이 깨고, 오후에 일을 했다. 고마운 담배 손님.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의 돈을 받고 일하는 거였기 때문에 그 자체로 뿌듯해서 대부분의 시간은 열심히 일했다. 특히 마네킹에 옷을 코디해서 입히는 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재미있었다. 일단 패션 감각이 없어서 옷을 코디하는 게 쉽지가 않았지만, 의상디자인을 공부하는 친구를 가게에 불러서 같이 코디를 했다. 마네킹은 똑바로 서 있는 남자 하나, 역시 똑바로 서 있는 여자 하나,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 하나, 서 있는 아이 하나 총 4개였는데,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 마네킹은 옷 입히기가 어려웠다. 옷감이 얇으면 옷이 찢어질세라 조심조심~
가끔 가게에 들러 판매대금을 수금하러 오면 사장님이 칭찬도 해주고, 그 월급으로 용돈도 해결하고, 마네킹 코디를 도와준 친구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른 없이 배낭을 둘러매고서 국내 여행도 갔다. 여자들끼리 여행가는 건 위험하다거나, 여행가서 문을 연 식당에서 여자 손님이 첫 식사를 하면 그날 재수가 없다고 대놓고 말하던 그런 시절이었기 때문에, 열 아홉에 스스로 정직하게 돈을 벌어서 떠난 여행은 자랑스럽고 용감했고 뜻깊었다.
즐거운 여름을 보내고 이듬해 늦봄, 사장님한테 연락이 왔다. 두 달간 작년처럼 또 같은 가게에서 일을 해달라고 했다. 우와 또 알바를 하게 되다니! 역시나 전해 여름 두달간처럼 혼자 일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참 기뻤다.
그런데... 전해 여름처럼 옷이 팔리지 않았다. 아니 도무지 옷이 팔릴 기미가 없었다. 옷이 한 벌도 안 팔리니까 그렇게 밀려오던 한낮의 졸음이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전해 여름처럼 백반집에 점심을 시켜먹기도 미안하고 걱정도 됐다. 외부에 있는 사장님께 전화를 하여 더듬더듬 옷이 안 팔린다고 말도 했는데, 사장님은 옷 가게 말고 하는 다른 일로 뭔가 몹시 바빠 보였고 도매로 새 옷을 떼오질 않았다. 봄에 남은 옷 하고 지난 여름 재고만 가게에 있으니 당연하게도 옷이 팔리지 않았다.
사장님은 감감무소식. 그러다 나도 지쳤다. 며칠째 손님은 한 명도 안 보이고 그나마 담배 손님조차 뚝 끊겼다. 일하기로 약속한 두 달 끝 무렵. ‘에라, 나도 모르겠다’ 싶어서 매장 한구석에 있는 작은 옷 창고에 들어가서 낮잠을 잤다. 매장에서 쓰는 작은 선풍기까지 갖고 들어가서 켜놓고 꿀잠을 쿨쿨 자고 있는데, 한 30분 지났을까? 갑자기 천둥 같은 불호령이 들려왔다.
“아니, 일을 해야지. 잠을 자고 있어!”
눈을 비비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달 여만에 만난 사장님이 서 있었다. 하시는 말씀이 틀린 말은 하나도 없어서 야단을 들으면서 묵묵히 매장을 청소했다. ‘왜 하필이면 고르고 골라 작정하고 낮잠 잔 날 걸렸지?’ 푸념하며, 그 와중에도 나는 여전히 사장님이 새 옷을 도매로 떼어 왔는지가 참 궁금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새 옷 없이 빈손이었다. 그간의 매출이 없으니 수금해갈 돈도 없고 그냥 빈손으로 되돌아 가시게 됐다. 다시금 호통치고 가셨다.
어쨌든 그러고서 두 달치 월급을 떼였다. 사장님한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영원히~. 당시는 최저임금이 10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은 시절인데, 물론 이때 나는 최저임금제란 게 뭔지도 몰랐다. 게다가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직원들 월급을 못 주고 밀려 있는 달에는 몇날며칠 꼬박 날 새다시피 하며 얼굴이 푸석푸석 썩어들어가는 걸 본 적이 있어서, 사장님께 월급을 달라고 채근할 마음은 없었고 사정이 풀리면 주겠지 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점심시간에 졸기도 하고 창고에 드러누워 잠도 잤으니 월급을 못 받거나 조금 덜 받아도(이미 최저임금 아래 임금인데!^^) 하는 수 없다고만 여겼다. 어차피 두 달치 월급을 안 줄 거였으면 낮잠 잔날 고함이나 치지 말지 싶었다. 꽤 시간이 흐르고서야 사실 점심시간은 무급시간에 휴게시간이기 때문에 내가 졸든 자든 혼날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내 아버지 같은 실력이면 애초에 사업을 안 하는 게 여러 사람 안 피곤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빠 미안^^ 하지만 이게 진실이야.)
프랑스인 친구가 중학생 때부터 노동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노동법, 노동운동, 노동조합, 단체협약, 단체교섭, 유니언샵, 산별노조, 국제노동기구 등등 딱히 경제나 노동을 전공하는 것도, 공부를 썩 잘 하는 친구도 아닌데(친구야 미안^^) 그냥 마땅히 누구나 알아야 할 상식 중 하나처럼 훤히 알고 있어서 무척 놀랐었고, 뒤늦게나마 나도 그 친구처럼 잘 알고 배우기 위해 힘썼다.
민주노조가 생긴 지 30여년도 넘게 지났지만(민주화 투쟁 이후 겨우 실질적으로 노조활동을 보장받게 되었음), 오늘날에도 일하는 사람의 권리는 완전히 존중받고 있다고는 할 수는 없다. 긴박한 경영상 필요만 있으면 기업의 경영책임을 묻는 일 없이 해고도 인정되고, 기업은 딱하다며 동정을 받아도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노조는 자기들 밥그릇만 챙긴다며 번번이 지탄을 받는다.
나중에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할 때,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과로(근무시간은 9-6시인데 새벽 1시에 퇴근을 하고 다음날 9시에 또 출근을 반복함. 야근식대 및 시간외수당 없음ㅜㅜ )를 시켜서, 노조를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열을 내며 같이 하자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빠졌다. 갑자기 말도 없이 이직해버린 동료, 조용히 불러내서 “나는 도저히 안 되겠어” 하던 동료.
결국 노조는 못 만들고,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만 몇 번을 고쳐 쓰다가 나도 금방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노조를 만들면 전임자도 둘 수 있고 하니까 내가 전임자가 되어도 좋을 거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한 동료가 빠지게 되면서 덜컥 겁이 났다. 뭔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릿속의 지식은 전보다 많아졌는데도 선뜻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배움과 용기는 분명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당시 친기업적인 MB정권 때 노조법이 바뀌어서 노조전임자 임금이 노동조합비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이는 국제노동기구ILO 권고 위반사항으로 2021년에 개정노조법에서 삭제됨), 그 무렵 노조전임자는 일 안 하고 노는 사람이란 흑색선전이 횡횡했고, 이 모든 걸 총체적으로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해지기 전에 쓰레기 주으러 나갔다. 동네 하수구 근처의 바나나 껍질이니, 캔이니, 부서진 페트병이니 다 줍는다. 하수구에 낙엽이 있어서 줍고 보니 흙이 낙엽에 더덕더덕 붙어 있다.
지난 폭우 8월 8일에 반지하 집에서 침수로 인해 숨진 발달장애인 가족 중 한 분이 노조전임자로 일하신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후속 뉴스로 알게 되었다. 면세점 협력업체에서 20여년간 판매직으로 일하셨고, 4년간은 지부 노조전임자로 활동하신 분이셨다고 한다. 단지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된 분이 아니었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다른 동료들의 권리를 위해, 인간의 당연한 권리인 사회권(노동권)을 위해서 노력해오신 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애통하게 돌아가신 여성이 삶에서 보여주신 용기가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 일해서 삶을 꾸려가는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절실하게) 잘 알고 있다. 애도 이상의 존경심이 그대 가시는 그 길에 조금이나마 닿기를 바랍니다.
보름달 비추는 2022년 8월 12일 나의 플로깅 64번째날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