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깅 75번째
당근에서 중고거래할 일이 있어서 옆옆옆 동네로 갔다. 평소에 좀 거리가 있어서 잘 가지 않는 아파트촌이다. 우리 동네와 달리 휴지 하나 안 떨어져 있고, 깨끗하다. 거래를 잘 마치고 돌아서 걷는데, 아파트숲 가운데 높이 치솟은 십자가 아래로 큼지막한 현수막(펼침막)이 보인다.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가 웬말이냐. 동성결혼 반대, 차별금지법 반대”라고 한 대형교회에서 크게 써서 교회건물에 걸어 놓았다.
오래간만이다. 2006년 차별금지법 제정이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공론화될 때, 수도 없이 보던 문구인데, 2022년이니까 16년 만이다. 단어 하나, 문구 하나 바꾸지 않고 똑같다. 아, 한 단어가 바뀌었다. 동성애가 동성결혼으로. 아, 그리고 현수막 크기도 폰트(글자체)의 크기도 열 배는 넘게 커졌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을 탄 것 같다. 이미 유엔 인권기구들도 어서 제정하라고 촉구한 바 있는 차별금지법인데.
이 대형교회는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방역 수칙을 위반하여서 여러 언론에서 많이 보도되었다. 얼마 후 이 교회는 대면예배를 금지한 행정당국을 대상으로 한 행정소송에서 승소하였다. 열흘 정도 운영 정지 행정처분을 받자 교회가 제기한 소송이었는데, 2021년 국민의 50%가 첫 백신 접종을 완료하기 한 달 전쯤에 교회가 승소 판결을 받았다.
나는 간만에 보았지만, 저런 현수막은 나의 옆옆옆 동네 대형교회뿐만 아니라, 전국 여기저기서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참 많이 나온 듯하다. 1년 전쯤이던가. 뉴스에서 "차별금지법이 생기면 사장님 해고 마음대로 못합니다. 건강한 가정과 생명을 지킵시다"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있는 이들을 보았다. 해고를 정당한 사유 없이 하려고 차별금지법이 생기면 안 된다라는 겁니까. 어불성설에 껄껄 헛웃음 짓다.
동성혼은 며느리가 남자가 되고 사위가 여자가 되는 식의 일이 아닐뿐더러, 결혼제도 속에서도 이미 아내(여자)와 남편(남자)의 전통적 성역할은 사회변화에 따라 흔들려 온 지 오래됐다. 한국사회에서 여자라는 성이 마땅히 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나의 어머니 세대 여성들이 집안에서도 집바깥에서도 그야말로 눈만 뜨면 일,일,일만 죽어라 하면서도, 집안팎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푸대접 받고 힘겹게 살았는지.
자신과 같은 운명을 딸에게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딸과 정다운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하고 끊임없이 일하시다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만 어머니 세대의 여성들의 사랑과 삶. 그걸 알고 사랑하고 기억하는 한 사람으로서, 적어도 나는 흔들려 마땅한 변화가 있다고 여긴다.
아니 아니, 비이성적인 글귀 앞에서 차별금지법이 지금 당장 있어야 할, 정말로 수도 없이 많은 합리적인 이유를 여기에 일일이 열거하면서 씨름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한없이 맑은 하늘 아래, 거꾸로 가는 이 서글프다면 서글픈 시간여행 가운데.
이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고개 들어 하늘을 볼 때, 파란 하늘 흰 구름이나 붉은 노을 대신에, 종교의 자유란 명목으로 자신(인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저런 현수막을 봐야 하는, 누군가의 기분, 이를테면 성소수자 청소년들의 기분이 어떨까, 어쩌면 외로울까, 외롭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실시된 한 설문결과에 따르면, 청소년 성소수자 가운데 약 47%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또 성소수자라고 정체화를 하지 않고 관심도 없거나, 아니면, 이것저것 살면서 하는 탐색(탐구)과정 중에 있는데, 자꾸 검열을 조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과거의 성역할에 맞지 않는다는 식의 단순한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는 청소년들도 있을 텐데. 이런 류의 현수막을 이리 특대형 사이즈로 제작해서, 그걸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버젓이 나부끼게 하고, 그걸 용인하는 문제.
사랑은 대체 어디에...삶은 대체 어디에...인간은 대체 어디에...
1990년대 중반이던가. 대형교회에 다니는 친구가 좋은 교회가 있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다른 친구 한 명과 따라나섰다. 거대하고 멋진 외형의 건물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청년부 예배는 대학부/전문대학부/일반부(대학에 안 다니는 이십대가 일반부)로 나눠 진행된다."는 말을 들었다. (대학, 전문대, 일반 등의 나열 순서 또한 30년 전에 내가 들은 말의 순서 그대로임.)
대학부 또한 스카이(당시에 명문대라고 함)와 비스카이(비명문대)로 쪼개져 있었다. 스카이부는 그 큰 교회 건물 중 햇빛이 잘 들어오는 그런 지상의 공간에 들어갔고, 일반부는 지하 공간으로 갔다. 친구들과 찢어져 어리둥절하고 있다가, 설교 말씀을 들었다.
당시 외국에 큰 지진이 있었는데 그런 재난을 당한 외국의 국민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댓가로 천벌을 받은 것이란 요지의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말이었다. 지진은 하늘이 노해서가 아니고, 수평이동을 하는 지구의 지각판 경계에서 일어난다. ('판 구조론') 귀가 따가운 설교 후에는 곧바로 (일반부는 일반부대로, 스카이부는 스카이부대로) 남녀 짝짓기를 하듯 레크리에이션을 시작했다.
이래 봬도 내가 어릴 적 교회에 다닐 때 성경 구절을 줄줄줄 암송하며 예수님의 여러 가지 깊은 사랑 이야기에 탄복한 그런 어린이였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사랑에 대한 믿음과 이런 믿음에 대한 나의 자긍심은 그 자리에 있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
끼리끼리 동질한 남녀의 만남, 연애나 결혼을 위해 같이 간 친구 셋조차 저런 기준으로 쪼개고 나누어서 드리는 종교의식. 세속적이지 않은 순수한 믿음, 소망,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게끔 고독으로, 죽음으로 내모는 혐오나 증오, 그리고, 차별과 편견으로 얻어서 고양하는 기이한 우월함 속으로, 사람을 결속결집하는 데에, 분별없이 동참하는 순진함을 거부하고서, 이런 물음을 던지고 싶다.
왜 사.랑.을 위하여(=어째서 더 사랑하기 위하여) 고뇌하지 않는가?
현대 영문학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 <고독의 우물 The Well of Loneliness>(1928년작)을 쓴 작가 래드클리프 홀(Radclyffe Hall, 1880~1943). 홀의 묘비에는 영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랑 시로 일컫는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Elizabeth Barrett Browning, 1806~1862년)의 시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How Do I love Thee?'의 마지막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만약 신이 날 부르시면, 목숨이 다한 후에도 더욱 그대를 사랑할 겁니다. ...And If God Choose, I Shall But Love Thee Better After Death."
옆옆옆 동네 현수막을 보고 온 이래, 우리 동네나 옆동네에 인도를 점령하며 늘어선 쓰레기더미를 보았다. 쓰레기 배출요일에 맞춰 내놓은 것이긴 하지만, 잘 걸어다니는 나도 난감한데, 휠체어 사용자는 지나갈 수가 없다. 사랑 없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현생인류는 다가올 인류의 미래를 훔쳐 쓰면서, 사랑 없이 자신 스스로도 위태롭게 산다.
오늘도 그 거대한 현수막은 펄럭펄럭 하고 있으려나.
현수막은 요즘 몇 년간 선거 후에 종종 골칫거리 쓰레기 문제로 그 처리에 대해 거론되는데, 이미 지자체마다 이런저런 폐현수막이 쌓여 있다고 한다. 누구든 지자체 담당과에 연락하면 가져가서 폐기물 마대, 농사용 가림막, 장바구니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다이옥신
폴리에스테르가 주성분인 현수막은 썩지 않기 때문에 소각하며, 태울 때 다이옥신과 같은 유해물질이 나온다.
다이옥신은 과거 고엽제(고엽이란 잎을 마르게 한다는 뜻, 즉 제초제)에 쓰이기도 했다. 고엽제는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할 때 정글을 태워서 게릴라전에서 이기려고 베트남서 사용한 ‘에이전트 오렌지’(상품명)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고엽제가 살포된 적이 있다.
비무장지대DMZ, 미군기지에서 한국전쟁 휴전 직후, 또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이다. 살포작업에는 군인뿐 아니라 인근 주민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2011년 한국 국회에서 퇴역 주한미군들은 1970년 말에 주한미군기지(파주, 칠곡 등 미군캠프) 내에서 고엽제의 살포나 매몰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에 미국 정부나 미군 지휘부는 말단 병사들에게 고엽제의 폐해를 알려주지 않아서 증언한 미군들도 건강상 피해를 겪고 있었는데, 서울에도 고엽제 저장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폭넓게 고엽제의 피해 범위를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건강피해. 이런 상황들이 우리가 바로 종전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오늘의 정리
에이전트 오렌지 대량 살포 지역 콘뚬(Kon Tum)에서 후유증으로 인해 샴쌍동이로 태어난 베트남인 구엔 도끄(Nguyen Duc)의 책을 인용하며, 오늘의 길고 긴 이 글을 마칠까 한다.
1981년 2월 25일에 태어난 구엔 도끄는 형 구엔 베트(Nguyen Viet)와 하반신(배와 생식기, 항문, 다리)이 이어져 있었다. 1986년부터 형 베트가 자주 발작을 일으키고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되어, 1988년 7살 때 분리수술을 받게 된다. 수술 후 형 베트는 식물인간이 되었지만, 19년을 버텨서 2007년 26살 때까지 살았고, 구엔 도끄는 지금 호치민에서 살고 있다.
구엔 도끄가 20살 때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는 어느 날 한 사람의 몸이 되었다. 베트와 따로 떨어진 것이다. 나의 형제이자 친구인 베트는 지금 병들어 누워 있다. 베트는 나를 살려주고 그렇게 누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베트와 한방에서 사는 나는 매일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다. 베트가 건강해져서 예전처럼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베트와 몸은 떨어졌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그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베트의 기쁨과 슬픔을 항상 마음으로 느낄 것이다."
2001년 1월 호치민시 투두병원에서
구엔 도끄 <나는 샴쌍둥이> (2004년, 창해)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