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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드플로거 Oct 23. 2022

네 이름을 찾아

플로깅 76번째

딱 한 송이 핀 봉숭아꽃. 쓰레기가 종종 버려지는 동네화단에 씨를 심고 싹이 트고 잎이 나고 물을 주고 지루한 기다림을 거쳐, 단 한 송이만 피고 그걸로 끝일 줄 알았다. 


그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여름 끝자락에 봉숭아 꽃이 또 피었다. 보라색 봉숭아꽃이 첫 번째로 피고 지고서, 분홍색 봉숭아꽃이 두 번째로 피었다. 기적인가? 


해질 무렵 햇살 아래 꽃과 이파리들의 색감이 참 좋아서,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여름의 끝을 알리고, 꽃은 졌다.(좌) 봉숭아 옆화단 옥잠화가 멋지게 시들어가고 있다.(우)


그런데, 저번에 핀 봉숭아 꽃은 보라색이다. 분명 같은 씨앗인데, 왜 이번에 핀 꽃은 분홍색일까? 



궁금해서 이유를 찾는데, 헤매다가 마침내 초등학생이 질문하고 과학자가 답하는 사이트에서 답을 찾았다. ㅎㅎ 이 학생 예리하네. 예로부터 좋은 탐구(연구)의 시작은 좋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같은 줄기에서도 색이 다른 봉숭아꽃이 필 수가 있는데,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꽃 색소(안토시아닌)와 관련된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났거나, 혹은 토양의 pH(산성도 또는 염기도를 나타내는 척도=수소 이온의 농도를 음의 로그값으로 나타냄. 리트머스처럼 토양이 산성이면 푸른색 계열, 알칼리성이면 분홍 계열) 때문이거나, 혹은 싹이 텄을 때 싹이 받은 빛의 양에 따라 싹마다 안토시아닌 합성에 차이가 났을 가능성 등등. 


집에 있는 배양토를 화단 일부분에 뿌려 줬기 때문에, 둥근 화단 흙 여기저기 pH가 달랐나 싶었다가, 뿌린 흙의 양이 별로 많지 않아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싹이 텄을 때 빛이 양이 달랐나보다로 결론을 내린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추리가 재밌었다. 참고로 봉숭아꽃, 잎, 줄기를 추출해 견직물을 염색하는 법도 있는 듯.




의문이 하나 풀릴 때 쯤, 세 번째로 분홍 봉숭아꽃이 또 피고서, 흐린 날이 됐다. 


평소처럼 집 주변 쓰레기를 줍고, 양이 얼마 되지 않는 동네화단 쓰레기터 쓰레기를 줍고. 엇? 오늘은 특이한 쓰레기가 있네? 먹다 남은 생선 쓰레기가 길바닥에 찰싹 눌러붙었다. 고등어인가? 


쓰레기집게로 안 집어진다. 음식쓰레기를 내놓을 때 누군가 실수로 떨어뜨리고 간 것 같다. 마스크를 뚫고 들어온 썩은내가 매우 강렬해서 "그래도 좀 줍고 가지 이게 뭡니까.." 외치고서, 근데 꼬리까지 생선 모양 그대로 눌러붙은 모양새가 우습다. 굴비인가?


집앞 쓰레기 줍줍. 스티로폼 조각, 불법사채명함(지겹다 지겨워 그만 좀 뿌려라) 등을 줍줍. 엥.치실도 떨어져있네? 길바닥에 눌러붙은 생선쓰레기는 휴지로 긁어내서 쓰레기종량제봉투


냄새 탓에 기분전환 삼아 화단 앞으로 갔다. 어라? 봉숭아 줄기 아래로 아주 작고,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특이하게 작은 꽃. 손톱 반의 반만 하다. 하얀 꽃잎까지 포함해 지름이 0.5㎝도 안 되는 것 같다. 잎과 줄기에 솜털이 나 있다. 봉숭아 잎처럼 잎끝이 톱니같다. 작디작은 이 꽃. 이름이 대체 뭘까?


궁금해서 그 자리에서 꽃 검색을 후다닥 해봤는데 크기가 작아서인지 잘 나오지 않는다. 모르겠어서, 사진을 찍어두어서 집에 돌아와서 구글링해보았다. 구글 이미지상으로는 쑥부쟁이를 닮았는데, 앗 전혀 아니네, 크기가 이토록 작은 걸 보면 빗자루국화인가? 아니, 아니야. 도리도리. 어지럽다! 작작 쫌! ㅋㅋ 나는 너를 심은 적이 없다구!!!   


봉숭아 줄기 아래 핀 이토록 작디작은 꽃~ 사진 확대(우측) 이때만 해도 미처 몰랐다. 이름 찾아내기가 이토록 어려울 줄은...


국가생물다양성 정보공유체계(야생화 표본사진이 데이터베이스로 업로드되어 있고 설명이 간략히 잘 나와 있으나 검색은 어렵다), 한국잡초학회 데이터베이스,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등 이런 사이트들이 있다니 감탄하며 잠깐 찾아봤으나 실패했다. 검색 실력이 떨어지나? 이름을 도대체 모르겠네.


애초에 봉숭아조차 맨드라미인 줄 알고 키우고, 게다가 봉숭아꽃은 빨간색만 있는 줄 알던 이몸이올시다. 나의 앎은 얼마나 얕고 한정적인가. 기분좋은 깨달음으로 탄식하면서도, 금방 찾을 수 있겠지 싶었다.... 허나 그렇지 못했다...


알아맞춰 보실래요? 힌트가 있어요. 굵은 글씨에 집중해주세요. 


◆ 힌트: 이곳은 쓰레기를 모아 버리고 온갖 쓰레기 투기도 자주 하는 쓰레기터 바로 옆 화단으로서, 쓰레기가 종종 버려지는 이 화단에 작디작은 이 피었네요. ◆


어처구니 없는 문구가 담긴 불법사채 광고 명함(작작 좀 뿌려대라!)을 주워서 이 작디작은 꽃 크기를 가늠해봤다. 정말 작다..이름이 뭐니..

   



그러고 며칠 지나서 일이 있어 서점에 들렀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는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야생화도감(잡초도감) 앞에 서 있다. 펄럭펄럭 도감을 넘기는데, 오호라, 비슷한 꽃이 있다. 


별꽃. 이야, 꽃이름이 뭐 이리 이쁜가? 도감에 실린 작은 사진을 언뜻 보니, 꽃잎이 하트 모양으로 비슷하게 생겼고 5개이다. 크기도 비슷하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으니, 별꽃은 땅에 덩굴 모양으로 뻗는다고 하는데, 봉숭아 줄기 아래 자그마하던 꽃은 분명 땅 위로 솟아 있었다.       


별꽃도 아닌가 보다. 그럼 다음장에 실린 애기별꽃이란 말인가? 역시 아니다. 그럼 다다음장에 실린 쇠별꽃, 큰별꽃, 뚜껑별꽃, 별꽃산별인가? 이야! 비슷하게 생긴 꽃이라 그런가 이름, 학명이 비슷한 다른 꽃이 아, 많기도 많다. 어허, 다 아닌데?


별꽃, 쇠별꽃 (인터넷서 공공 도메인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 인터넷서 큰 사진으로 보니, 완전 다르네요.


생물의 다양성에 다시금 경의를 표하고, 찾기를 포기했다. 그래도 이름 찾는 과정에서 별꽃이 예전에 소금과 같이 볶아서 치약 대용으로 썼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기뻤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물음을 가슴속에 소중히 남겨 두자.


내가 찾는, 기특하리만치 작은꽃과 외양이 꽤 닮았으니까, 별꽃과 같은 친척(속=generic name)쯤 되겠지? 진실에 바짝 다가섰나?...  


드디어 알게 됐습니다. 충격의 그 이름.

기온이 뚝 떨어져 시작된 가을밤. 도서관서 책을 뒤적이다가 집어 든 책 <강우근의 들꽃이야기>(강우근 지음, 메이데이, 2010년).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이름을 알게 됐다.      


      털별꽃아재비      


책에 털별꽃아재비가 보도블럭 사이에서 핀 사진이 딱 실려 있는데, 내가 찍은 조그만 꽃과 똑같았다. 사진 밑에 써진 문장을 읽어보니, 꽃 크기가 밥풀때기만 하다고. 오, 그래. 진짜 밥풀때기만 했었지. 잡초는 잡초인데, 그날따라 왜 그런지 그토록 작은 꽃이 필 수 있다는 게 신비롭게 느껴졌었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다. 그런데 집에 와서 ‘털별꽃아재비’로 구글링 해보니, 헉.       


‘쓰레기풀’ ‘쓰레기꽃’이라는 별칭이 있다고. 쓰레기풀보다는 '쓰레기꽃'이란 명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듯. 

털별꽃아재비=쓰레기꽃


길가나 빈터 어디서나 자라며 쓰레기터 잡초군락을 이루는 식물이고, 쓰레기더미, 쓰레기매립지 주변에도 자주 나타난다고. 보니까 하천가, 공터 등에 넓게 군락지가 형성된 사진이 꽤 많다. 


더러운 데서 잘 자라며, 환경적응력 및 번식력이 두루 강하다. 땅 위로 솟구치듯, 위로 1미터 가량 쑥쑥 자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귀화식물(국외에서 온 식물이 자력으로 토착화되어 잘 자랄 때)이고, '만수국아재비'라 부르기도 하는 듯. 여기저기 쓰레기를 지금보다 훨씬 더 그야말로 함부로 버리던 문화가 있던 과거, 환경을 도외시한 개발독재산업화의 시대를 기억하는 분들 가운데 이 꽃의 존재를 아는 분이 꽤 많은 듯 하다. 유투브에서 친절하게 이 쓰레기꽃을 자세히 설명해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이 꽃이 핀, 내가 심은 봉숭아꽃 동네화단은 쓰레기터 바로 옆에 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자라서 마땅한 꽃이었다. 상식적인 추측만 했어도 '쓰레기꽃'이란 명칭을 생각해낼 수 있었는데. 털별꽃아재비를 금방 알게 되었을텐데.


"더러운 데서 잘 자라며"에서 좀 충격을 받긴 했다. 쓰레기터에는 벌레도 살고, 쥐도 살고, 쓰레기꽃도 살고, 나같이 번뇌 많은 사람도 왔다갔다 하고, 그리고 쓰레기로 생계를 꾸려가는 분들도 계시고...(아, 그런데 요새 폐지 가격이 절반으로 뚝 내려갔대요. 물가상승도 힘든데...)

  



이름을 알게 되니, 더 알게 되는 게 많다. 


우선, 쓰레기꽃은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라는 점. 다섯 장의 하트 모양의 흰 꽃잎인 줄 알았던 건, 알고보니, 설상(혓바닥 모양이란 뜻)의 꽃이었다. 노란 부분은 관상(관 모양의)의 꽃이다. 그래서 쓰레기꽃은 설상화+관상화라고. 참고로 코스모스 등은 설상화+관상화라고. (여기서부터는 공부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우니 그만하겠습니다...)


향도 강하다는데, 사람에 따라 박하향도 났다가 쑥향도 났다가, 아니면 엄청나게 고약한 냄새도 맡는다는데. 사람마다 향도 다르다는 걸 알게 되니 또 한 번 호기심이 발동하여, 저 작은 꽃에 내 코를 다짜고짜 들이밀어보았다. 그러나 하도 작아서 냄새가 안 났다. 군락지에 가야 냄새가 날 듯하다. 그리고 식용하시는 분들도 계시다는데, 먹어도 괜찮을지는 잘 모르겠다. 


환경지표종(환경 상황 등을 평가하는데 이용되는 동식물, 미생물 등), 기후변화생물지표종 비슷하게 개념을 잡아서, 쓰레기꽃을 쓰레기청결지표종 같은 걸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정리 

털별꽃아재비=쓰레기꽃은 서리가 내리기까지 꽃이 핀다니까 아무튼 대.단.하.다..


그런데 여기까지 나의 탐구와 결과는 다 좋았으나, 한 가지 부작용이 딸려 왔다. 이름을 알게 되고 분별할 수 있게 된 날부터, 동반된 부작용... 아니, 동네 곳곳에 왜 이리 쓰레기꽃이 많은 것이냐.... 시력도 그다지 좋지 않은데, 아뉘, 이 작디작은 꽃이 어찌나 잘 보이는지. 이 골목, 저 골목, 서울의 이길저길. 낮이나 밤이나, 쓰레기꽃만 보인다. ㅎㅎ 아.... 지금 우리도 (재)개발, (재)개발하며 쫓기듯 살고 있어서일까, 쓰레기꽃이 많긴 많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름을 찾고서 ‘네이처링’ (www.naturing.net)이라고 시민들이 위치에 기반해 꽃이랑 새 등의 사진을 찍어 올리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는데, 거기서 보니까 쓰레기꽃이 전국 방방곡곡에 피어 있었다.  


네이처링 사이트는 활동하는 많은 시민들이 야생조류 유리창(투명) 충돌 방지 캠페인도 벌이는 등 좋은 사이트이다. 그런데 이 사이트에서 쓰레기꽃을 보고 나니 한층 더 쓰레기꽃이 잘 보이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어느 가을날 나는 쓰레기꽃을 피해서, 서울을 떠나 근교로 나들이를 갔다. 


아 물좋고 공기좋고 아 그곳에서 문득 쳐다본 하수구 속에 쓰레기꽃이..^^!


플로깅 76번째 끝!


서울에서 도망쳐서 한적한 곳으로 가을 나들이를 갔는데 거기에도 쓰레기꽃만...눈에 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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