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소다, 혹은 생강라떼] 가닿은 진심

by 수빈

지우는 생강라떼 한 잔을 다 비울 때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엔 지우가 먼저 얘기해주길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서 지우를 의식하지 않는 척 카페 안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우가 다 마신 컵을 마지막으로 씻어 정리하고 지우 앞에 마주섰다. 그제서야 지우는 나를 바라봤다.


“하린이는 모두가 다 좋아해요. 그런데 저는 하린이가 불편해요.”

“왜 그런 거 같아?”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다른 친구들에게 이야기 해봤자 이해하지 못 할 거라는 거 알아요. 그냥. 그냥 있잖아요. 하린이가 절 싫어하는 거 같아요.”


지우는 양손을 꾹 쥐었다 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려운 거 같았다.


“그 때는 그럼 왜 잠수탄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잠수 안 탔어요. 저는…. 하린이에게 메세지를 보냈어요. 근데 그 날 밤까지도 읽지 않더라고요. 다음 날 학교에 가니까, 저는 책임감 없는 애가 돼 있었어요. 다른 애들은, 변명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어요.”


지우는 억울한 듯 입술을 꾹 물었다가, 곧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사실, 다시 연락했어야 했어요. 그건 알아요. 제 잘못이에요. 그래도…. 그래도 제 몫은 다 정리해서 보냈어요. 제가 해야하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어요.”


지우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고요한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하린은 왜 그랬을까? 아이들에 둘러 쌓여있는 하린을 떠올려본다. 모두의 관심을 받고, 누구에게나 다정한 아이.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분명 하린의 별 생각없는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애들이랑 오해를 풀고 싶은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나도 그런 적 있어.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어느 날 나를 대하는 태도들이 바뀌어 있는 거야. 그런데 전혀 짐작가는 부분이 없어서 괴로웠어.”


나의 덤덤한 고백에 지우는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초연하게 내 얼굴을 담고 있었다.


“차라리 크게 화를 내줬으면, 했어. 내가 먼저 말 걸기가 어렵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졌지.”


가슴 한 켠이 찡하고 진동이 일었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던 상처는, 그저 숨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인데도, 잠깐의 회상으로 다시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면.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먼저 물어볼걸 그랬어. 어쩌면, 내가 먼저 말을 걸어주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오해를 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너는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야. 분명히,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진심으로 지우를 응원하고 싶었다. 혹시나 쓸데없는 내 오지랖이 문제를 더 키우는 건 아닐까, 해결이 안 되면 어쩌지, 작은 걱정이 마음 한쪽을 스쳤다. 하지만 나는, 말의 힘을 믿고 싶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거창한 조언도, 완벽한 계획도 아니니까. 무조건 잘 될거야, 나를 믿어.










지우는 부딪혀보고 싶다고 했다. 진지한 어투에 순간 웃음이 났다. 결의의 찬 얼굴이 귀여웠다. 다음 날, 지우는 하교 시간 무렵 카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가게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우는 문을 열지 못했다. 손잡이 근처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작게 눈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뒷모습은 금세 작아졌다. 그 다음 날, 지우는 문고리를 한참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가 그대로 놓아버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아’하는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까운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지우는 다시 내게 짧은 눈인사를 건넸다. 지우도 내심 아쉬운 표정이었다. 학교에서 카페까지 걸어오는 지우의 발걸음은 언제나 씩씩했다. 하지만 유리문 앞에 서면 마치 굳은 듯 움직이지 못 했다. 애꿎은 문고리만 쥐었다 놓고, 결국 다시 돌아서야 했다. 그런 날이 며칠이나 흘렀다.


그 날은 이제 정말 여름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아침부터 후덥지근했다. 오늘은 분명 앉을 자리 없이 북적이겠다는 예감에 나는 카페 안을 정리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학교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은 정해진 레일을 따라 달리는 기차처럼 카페로 향해 쏜살같이 몰려들었다.


학교에서 에어컨을 아직 틀어주지 않아 덥다며, 빨리 아이스 음료를 대령하지 않으면 카페를 폭발시킬 거 같은 아이들의 에너지가 가게 안을 가득 메웠다, 그 활기찬 열기 속에서 에어컨보다 더 강력한 생기들이 꿈틀거렸다. 하린과 친구들도 정해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린의 얼굴 쪽으로 유의물을 반 접어 부채질해주는 아이, 오늘 반에서 있었던 일을 하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조잘조잘 늘어놓는 아이, 그리고 그 옆에서 과장된 리액션으로 분위기를 더하는 아이까지. 하린은 여전히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내 신경은 자꾸 밖에 쏠렸다. 지우는 언제 올까, 오늘은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집중하지 못 하고 있던 그때, 저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지우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지우, 할 수 있다! 지우는 여느 때처럼 유리 문 앞에 멈췄다. 제발, 지우야. 할 수 있어. 나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지우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문고리로 힘 있게 내려앉았다. 긴장해서였는지,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지우가 들어왔다.


“이지우 아니야?”


카페 안으로 들어온 지우에게 하린 무리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하린은 무표정이었고, 그렇지 못 한 다른 아이들은 어딘가 짜증 섞인 얼굴들이었다. 지우는 자리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지우가 가까워지자 아이들의 표정엔 놀람이 번졌다.


“할 말 있어.”

“이제와서 무슨 할 말? 야, 됐어. 변명이라면 안 듣고 싶거든?”

“그래, 너 진짜 뻔뻔하다. 사과 할 거면 그 때 했어야지. 그래도 양심에 찔리긴 했나 보네? 하린이한테 미안하긴 하디?”


날선 말들이 앞다투어 쏟아졌다. 지우가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굳게 서 있는 지우의 뒷모습은 매우 단단해보였다. 오늘이라면, 오늘의 지우라면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지우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사과할 일 없어. 그날 정리한 내용, 하린이한테 메세지로 보냈어. 하지만 그날 저녁까지 하린이는 읽지 않았어. 물론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은 내 잘 못도 있어. 그치만 보내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지우의 말이 끝나자, 어리둥절한 표정이 아이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들의 시선은 어느새 하린에게로 옮겨졌다. 지금까지 지우에게 쏟아졌던 질문들과 달리 하린에게는 침묵했다. 아이들은 말없이 하린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해명을, 입장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잠시 침묵으 지키던 하린이 조용히 대답했다.


“맞아. 지우가 메세지를 보낸 건 사실이야. 근데 나도 한참 뒤에야 봤어. 내가 모든 메세지를 바로바로 확인하는 건 아니라서. 그날은 바빴고, 지우한테 온 메세지가 저 밑으로 밀려 있었거든. 그래서 확인을 못 했어.”


하린의 말이 끝나자, 공기 속엔 짧은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 말이 완벽한 사과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덮을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뭐야, 그럼 진짜 오해였네.’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난 또 진짜 잠수 탄 줄…. 그럼 그렇다고 다음 날 얘기해줬으면 좋았잖아.”


말투는 가벼웠지만, 어딘가 미안함이 묻어나는 듯 했다. 누군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또 다른 아이는 지우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물을 마셨다.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천천히 허리를 펴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지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뒷모습이 어쩐지 편안해 보였다.


“사과를 바라서 얘기한 건 아니야. 그냥, 사실을 바로잡고 싶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지우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하린과 지우에게 쏠렸던 시선은 흩어졌고, 술렁이던 카페 안은 조용해졌다. 지우는 내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멜론소다 주세요.”


한결 가벼워진 얼굴에는 조그만 미소가 피어 있었다. 순간 나는, 어떤 한 장면을 떠올렸다.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한 쉬는 시간 교실. 그 소란 한가운데,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 줄 이어폰에선 또래와는 거리가 먼 밴드 음악이 흘러나왔고, 아이는 말없이, 움직이지 않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 시작 종이 울리기 전까지, 그 자리에서 단 한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수업 종이 울리고, 교실 안으로 지우가 들어왔다. 조금 전 카페에서처럼,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지우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아이의 시선이, 창밖에서 지우에게로 옮겨갔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듯했다. 단단하게 선 지우는 아이 앞에서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가자.’


잠깐의 망설임, 잠시 망설이는 듯, 하지만 아이는 이내 지우의 손을 맞잡았다. 둘은 문밖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복도로 가볍게 뛰어나갔다. 순식간에 그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나도 교실을 박차고 뛰었다. 눈이 멀정도로 눈부신 햇빛 아래, 어디로 향는지도 모른 채 나는 전력으로 뛰었다. 해방된 자유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른다. 그 아이는, 내가 되지 않는 선택을 했다. 어쩌면 지금의 이지안이 아니라, 새로운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반응하고 있었다. 조금 늦었지만, 분명히. 누군가의 진심이 나를 지나, 어딘가에 닿았기 때문에.








사람의 관계는 참 어려운 거 같아요. 각자 다른 고유한 존재라서 그런가, 오해도 자주 생기구요.

그런데 갈등 관계를 해결하는 방법은 어쩌면 간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심으로 마주하기. 그럼에도 가닿지 않는다면 깔끔하게 포기하기.

정공법 외에는 통하지 않는 게 사람관계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글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여름이 코앞으로 다가온 거 같아요.

그래도 오락가락하는 날씨의 연속이죠. 다들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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