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점검이 있었다. 1시간 30분 동안 이어졌고, 갑작스럽게 작년 사업에 대한 브리핑을 요청받았다.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며 10분 남짓 설명했고, 20분은 평가 종료 후 서류를 작성하며 나눈 담소, 그리고 나머지 1시간은 논문 디펜스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느라 진땀을 뺐다. 끊임없이 던져지는 말들 사이에서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방어하려 애썼다. 다행히 분위기는 좋았다. 다행이도. 만약 그 자리가 작년 여름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뛰쳐나왔을지도 모른다.
점검을 마치고 라운딩까지 시켜드린 뒤, 나는 텅 빈 창의체험존에 몸을 눕혔다. 이틀 내내 새벽 5시 반 일어나 피곤하기도 했다. 이걸 내가 하는 게 맞는 건가? 팀장 배석 없이 나 혼자 들어가서 이렇게 방어하는 게 맞는 것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방어를 하는 것인가? 1년동안 했던 일들이 실패하지 않았다고 합리화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래도 나의 말에 이해를 한다는 식으로 대답해주는 평가위원에게 매달리고 싶었던 걸까.
(중략)
약을 먹으니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일단 말이 빨라졌다.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는 감정은 사라졌다. 다시 예전처럼 내 의견을 피력을 하고 싶어졌다. 좋은 건가? 사실 말을 줄이고 싶긴 하다. 실수하고 싶지도, 이제 그렇게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지도 않아서. 근데 본 성격이 그런 것을 어쩌겠나 싶다. 달라지는 것은 어렵다. 여전히 내가 한 행동, 말, 모든 것을 곱씹지만 그래도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남으로 인해 아프고 싶지 않다. 나를 사랑하고 싶다.
(중략)
그렇지만 상기해야 된다. 나는, ‘직업인으로서만의 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으로서의, 어딘가의 최수빈이 아닌 온전한 나로서의 최수빈이 분명히 있다고. 나는 아직 힘들다, 마음이. 아직 어딘가 망가져있다, 확실히. 그런 나를 위해서라도 포기해야 하는 지점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 250131_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기 발췌)
나는 어딘가에 소속된 ‘나’를 버리고 싶었다. 언제나 나를 소개할 땐 그 당시 소속된 회사가 먼저 따라 붙었다. ‘어디에 누구입니다.’ 그건 나를 완벽하게 대변하는 문장이었다. ‘개인의 나’는 없었다. 누군가 그렇게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어떤 대단한 사명감처럼 나는 조직을 위해, 타인을 위해, 성과를 위해 살아왔다. 그런데 내가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회사는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쓰다 버릴 수 있는 부속품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 앞에 붙은 모든 수식어를 떼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닌, 오로지 개인인 ‘나’로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나를 위한 아주 작은 실험 ‘오늘의 시리즈’ 프로젝트였다.
� 어떤 나보다 <오늘의 나> ㅣ 어제의 나를 발견하고, 오늘의 나로 살아가기
프로젝트 소개ㅣ
하루 중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시간은 과연 몇시간이나 될까? 우리는 ‘온전한 나’를 알고 있기는 한걸까? ‘직장인’으로서의 나, ‘자식’으로서의 나, ‘연인’으로서의 나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아직 발견하지 못 한 숨겨진 나를 발견하고 누군가의 기대 속의 나의 모습이 아닌, 어떤 나보다 행복한 <오늘의 나>로 살아가기 위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 프로젝트 소개 발췌(https://csubin.notion.site/PROJECT-LEVELZERO-b7f2074cdd464445a1dd55c261123733)
당시 가장 많이 만났던 친구들이 대학생이었는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고 끼니를 거르거나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것이 계속 마음에 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은 ‘함께 식사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집에 계셔서 더 그랬던 거 같은데, 저녁은 항상 모든 식구가 모여서 밥을 먹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나는 꽤 어릴 때부터 혼자 밥을 챙겨 먹었다. 한국 음식은 간장이냐, 고추장이냐만 다를 뿐 거의 비슷한 양념을 사용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레시피는 순식간에 늘었다. 내가 만든 요리를 다른 사람들이 맛있다고 해줄 때 신이 나서 요리에 재미를 붙인 것도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돌보기 위해 ‘건강한 삶’을 고민을 했고, 먼저 먹는 것부터 건강하게 먹고 싶다는 생각에 다다르며 ‘오늘의 식구’를 런칭하게 되었다. 오늘의 식구는 내가 오늘 먹는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 지는 지도 중요하지만 오늘 하루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식사를 하며 하루를 따뜻하게 마무리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나처럼 여러가지 상황으로 고립되었지만 어떻게든 연결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첫번째 오늘의 식구는 성공이었다고 하기엔 부족한 것이 많았다. 먼저 정원이 6명이었으나 3명이 참석했고, 1명은 대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 했다. 하지만 처음치고는 괜찮은 시작이었다.
� 오늘의 식구 모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식을 만들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힐링 그 자체였어요^^
�� 준비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꼭 안정적으로 대구의 한 커뮤니티로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 참가자 대상 만족도 설문지 중 코멘트 발췌
나는 나의 우울감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고 싶은 지.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조용히 공감해주었다. 그들이 내게 오늘의 좋은 저녁 식구가 되어줬듯이,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저녁 식구가 앞으로 되어주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회복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