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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비휘 Jun 02. 2021

언제나 언제까지나

지지대, 버팀목, 울타리가 될 수 있다면

“이~모, 이번 주말 시간 돼?  얼굴 보고 싶다.”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있은 지 1년 6개월은 훌쩍 지난 듯싶다. 울산 언니 집 큰 따닝은 시집가서 고1 여아, 중 2 남아 남매를 키우며 평촌에서 초등교사로. 둘째 따닝은 마포에서 중 1 남아, 초 5 여아 고교 수학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얼굴 못 본 지 오래돼도 넘 오래됐고, 얼마 전 수술 때도 못 봤으니 함 보자는 것이다. 어디서 만나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맛난 음식은 시키면 되니까 울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 엄마는 그 옛날 조카들 키움 양성소라도 된 마냥 언니 집 큰 따닝을 키우던 중 큰 오빠도 장가를 가서 남매를 낳아 엄마가 키워주는 걸로 되어버렸다. 울산 언니도, 큰 올케언니도 고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으니.


곧이어 태어난 언니의 둘째 따닝도 키워줬으면 했는데, 터울은 있다 해도 아이 넷을 키우기는 힘이 들었던 터. 둘째 따닝은 시어머니께서 봐주시는 걸로. 언니 집이 울 집에서 5분 거리에 살았기에 우리 집 넓은 앞마당은 그 당시 어린이집이 따로 없었던 듯하다.    


아이들 넷은 우리 엄마, 아부지의 몫이 되고, 가끔씩 자주 나의 도움이 아주 많이 투입되지 않았을까(?) 강제 놀이 선생으로.

큰 조카랑은 10살 차이. 나이 차이 좀 나는 동생 뻘이었으니 큰 조카랑 싸우기도 많이 했던 거 같다. 내 숙제 해 놓은 거 건드리고 망쳐놓으면, 소리 지르고 울고 불고 난리 쳤을 테고, 언니는 자기 따닝한테 그런다고 날 서운하게 했을 테고. 보나 마나 비디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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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조카들이 자라서 두 남매들을 키울 땐 육아휴직을 내어 여러 해 각자 키워냈었다. 어느 사이 고등, 중등, 초등 고학년이라는 아슬아슬 사춘기와 대입을 향해 달려가는 가장 중요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    


몇 년마다 학교를 정기적으로 옮겨야 하는 대상에 걸려 평촌에서 멀리 평택까지 출퇴근할 뻔했단다. 학교에서 기피하는 하는 업무를 도맡아 하는 걸 지원하면  가까운 곳에 근무할 수 있는 곳에 자원을 해 집 근처에서 근무하며 아이들을 캐어한다는 거다. 듣고 있는데, 눈물겨운 삶이고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못다 한 업무는 등산 가방 한가득 끌어안고 집에서 아이들 학원 가 있는 동안 밤늦은 시간까지 해결해 나가는.   

 

부모가 그렇게 할 때 아이들이 척척 착착 알아서 잘들 해준다면 무슨 걱정일까. 자유학기제가 되면서 모든 것이 셧다운. 게임하는 시간을 부모 폰으로 볼 수 있는 기능이 있는 모양인데, 한두 시간이 아니라는 거다. 사촌들끼리 같이 육아휴직을 할 땐 캠핑도 다니고 자주 만나 아주 친밀했던 관계를 물리적인 거리임에도 매일 온라인 상에서 만나 신나게 지내고 있다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단다.    


“이모 얼만큼 내려놔야 빠져나갈 수 있어?”


캄캄한 터널을 통과 중이라는 거다. 그 순간이 계속된다면 숨 막혀 죽을 거 같다는 거.

왜 그러지 않을까.  학원 가지 싫다면 내버려 두면 될 것을. 물찬제비보다 빠른 아이를 잡으러 다니며 놓치고는. 이모 또한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펑펑 울지 않았느냐.    

학원 안 가면 세상 무너지는 줄 알고. 그냥 기다려주고 내버려 둘 걸. 그 입장에 놓이면 그게 그렇게 불안하고 걱정되고 힘들다는 걸 왜 모를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뜻대로 내버려 둔다면 무슨 갈등이 있고 속상할까 말이다.

부모 살았을 적, 그나마 힘 짱짱할 때 조금이라도 탄탄하고 버팀목으로 설 수 있게 도움 주고 싶어 그런다는 걸.    

둘 다 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기에 내 아이들 중, 고등학생일 때 수시로 도움의 손길을 뻗었을 테다. 그럴 때마다 적절한 조언과 도움말을 줬을 텐데, 자기 아이들 키울 때랑은 또 다른 문제인 거다.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언니의 몸에서 태어난 두 조카인데, 아이를 대하는 것과 키우는 방법에서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저녁을 먹고 후식을 먹는 동안, 큰 조카의 아이들은 시간, 시간 전화가 걸려오며 중간보고를 해 오는 듯하다. 그에 반해 둘째 조카의 아이들은 전화 한 통 없다. 두 조카의 성격차가 완전히 다른 것만큼 아이들과의 반응도 다른 것인가.   

  

초등교사와 고교 교사의 학생들 대하는 접근방법이 다른 만큼 육아방법에서의 차이였던 걸까. 아주 가까이서 매일 봤더라면 추측하기가 쉬울 텐데...  잠깐 본 걸론 알 수 없는 것인 만큼 더 옳고 그르고도 없는 거.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키우느라 애썼을 조카들이 그저 대견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이 이렇게 저렇게 따라주고 해 주면 좋을 텐데, 로봇이 아니고 사람이었던지라 그러지 않은 것처럼 조카의 아이들도 부모의 말과는 많이 다르게 가고 있다는 거다.   

 

어쩌면 자기들의 세상에서 최상의 것을 취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 30년은 거뜬히 차이나는 부모의 삶에서 맞다고 옳다고 좋다고 생각한 것을 주입시키려 하는 건 아니었나. 그들은 그들이 살아나갈 세상을 촉으로 감지하며 해 나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이들 키우는 일에선 정답도 정도도 없는 듯하다. 아이들의 타고난 기질과 성격을 재빨리 알아채고, 그 장점과 강점을 최대한 살려내어 앞으로 나아갈 때 도움되면 참 좋고.     

중간중간 멈춤이 있더라도 더 큰 보폭 내딛기 위함을 믿으며 등 토닥여주며

잘하고 있다고, 정말 잘하고 있다고.    


언제나 언제까지나 엄마나 아빠는 네 편이라고.

 

바로 옆에 있는 지지대이고 버팀목일 수도 때론 조금 떨어져 있는 울타리로 있어 줄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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