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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비휘 Oct 08. 2021

대추 한 알에 온 세상이.

그냥 무르익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투툳!!”

아파트 통로를 나서는데, 발밑에 큰 소리를 내며 무언가 떨어졌습니다. 검붉게 잘 익은 대추 한 알이었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니 여기저기 가지치기를 해버린 나머지 가지에 대롱대롱 여러 알이 달려있었습니다.

저게 봄에 꽃 피기 시작해 다 익을 때까지 그냥 무르익은 것이 아님을 장석주 님의 대추 한 알이란 시로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히야, 시인님의  감성과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이 부러울 뿐입니다.


대추나무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봄날 꽃이라고 하기엔 수수한 연둣빛 목걸이나 귀걸이 알처럼 며칠 폈다가 연두 대추알이 쪼그맣게 밀고 올라옵니다.


출근길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버스 타러 가는 길에서 두 대추나무를 항상 만납니다. 대각선으로 서로 마주 보며 크기가 다른 두 대추나무가 서 있습니다.


왼쪽엔 연립주택 단지 내 화단에 심어진 대추나무. 도로 건너 오른쪽엔 상가 밖에 서 있는 울창한 대추나무입니다.  나무 크기나 가지의 우람함으로 봐선 상가 쪽에 훨씬 오래전에 심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연립주택 내 심어진 녀석들은 담장 밖 내다보는 게 재미있어 보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통 대추보다 큰 알을 올려보며 눈 맞추기를 해주니깐요. 어른 키 두 배 정도 되어 보입니다. 몇 알 되지 않는 대추알이 얼마나 큰지 하나만 먹어도 달콤 아삭한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상가 밖 주차장에 서 있는 대추나무는 아주 큰 나무입니다. 대추알이 얼마나 많이 열리는지.

[대추나무 사랑 열렸네]의 나무처럼 풍요롭고 풍성해 보입니다.  누가 특별히 손보거나 돌보는 이 없는 거 같은데요,  바람에 흔들리고, 햇볕 쪼이며, 천둥, 번개, 온갖 비  한가득 맞으며 알아서 커가는 느낌입니다.


어느 정도 크기만큼 연둣빛으로 다 자라고 난 뒤 붉게 익을 때의 대추는 특이합니다. 대봉감은 꼭지 쪽이 아닌 밑동부터 조금씩 주황빛으로 물들어 올라간다면 대추는 들쭉날쭉 제멋대로인 거 같았거든요.


햇볕 많이 쪼인 쪽인지, 천둥, 번개, 벼락 맞은 쪽부터 아님 비켜간 쪽부터 먼저 붉게 익는 것인지. 알마다 붉게 물드는 쪽과 면적이 다 달라 보입니다.


연립 주택 쪽에 있는 대추나무는 정남향, 상가 주차장 쪽은 북향에 자리했습니다. 여름날 정남향에 서 있는 나무 이파리가 햇볕을 받을 때면 진초록의 광택이 눈부실 정도였습니다. 탄력 있고 탱탱함이 이파리에서도 느껴졌습니다. 이파리의  건장함을 느낀 건 처음이지 싶은데요, 정말 선명한 심줄이 드러나 보이는 듯 최고의 빛깔이었습니다.


해마다 이 맘 때쯤이면 참 고마운 분이 생각납니다.  보은대추를 선물로 보내 주시는 분. 그이가 울산 현대자동차 입사 때부터 맺었던 인연이신 분 지금까지 잊지 않고 보내주십니다. 서울 와서 이사 다니다 보니 택배가 이전 집에  도착됐다는 연락을 받곤 했었지요. 아무리 처갓집에서 농사를 지으신다고 하지만, 한 해를 거르지 않고 보내주시는 정성은 가족이라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농사는 정성과 사랑을 쏟아부어지어야지 튼실한 열매와 단맛까지 주심을 알기에  한 알 한 알 아껴 소중하게 먹곤 했습니다. 가족 중 저만 먹는 대추, 온 가족 사랑받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출근길 오가며 찍었던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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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토채보 미술관 전시작품


대추 한 알에 온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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