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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비휘 Oct 20. 2021

편견

어른이 만들어 주진 않아야 할 텐데.

징그럽다며 꺄악 소리를 질러도 열두 번도 더 질렀을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보기만 해도 기겁을 하며 36계 줄행랑을 쳐야만 하는 거라고 어디서 배우고 학습된 걸까. 꿈틀대며 기어 다니는 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손으로 만지기는 어렵다. 초록 애벌레, 알밤 도토리 속살 애벌레, 지렁이, 굼벵이 등

열매의 계절 가을. 유치원에서 운영되는 별 동산에서 주워온 도토리와 알밤 잔뜩으로 5세 반 아이들 교실 앞에 꾸며졌다. 참나무 이파리나 여러 나뭇잎으론 방석을 만들었다. 폭신한  것이 엉덩이가 따뜻하니 마룻바닥이 차갑지 않아 좋다.


쪼꼬미들은 점심을 먹고 난 후 오종종 모여 앉아 알밤과 도토리를 가지고 논다. 소꿉놀이를 하고 알밤과 도토리를 살살 뿌리기도 하면서. 어느 날 누군가 꿈틀대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발견했나 보다.

“어디 어디 나도 좀 보여줘!”

새 볼거리와 관심거리에 난리가 났다.

서로 보겠다고 앞 다투다 보니 그것과 닮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꿈틀대는 게 보였다.  

여기저기 한두 마리가 아닌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많은 도토리와 알밤들 중 구멍 뽕뽕 뚫리지 않은 걸 찾는 게 더 빠를 지경이다.


“아~ 귀여워.”

“집에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

앙증맞은 아이들 눈에는 꼬물거리는 알밤과 도토리의 속살 색에 갈색머리를 가진 작은 애벌레도 귀여워 보이나 보다.


‘애비애비 벌레야~ 꺄악 만지면 안 돼요!’

그러고 싶은데, 그런 말을 했다간 아이들한테 핀잔을 들을 게 뻔하다. 만지지 말라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편견이 생기게 할 수는 없는 노릇. 한 마리 한 마리 소중하게 손이나 집게로 집어 소꿉 그릇에 담고 있다. 들여다볼수록 신기한 모양이다.


동화책이나 선생님께 들어서 알고 있는지 애벌레가 자라서 나비나 나방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선생님, 저도 좀 찾아주세요.”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다.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만지며 집어 드는 걸 보니 그 징그러웠을 애벌레들이 또 다르게 다가오긴 하다.

아무리 귀엽게 앙증맞아도 내빼면서 소리 지를 정도 아니어도 쪼꼬미들처럼 손으로 만지지는 못하겠다.


비가 오려고 할 땐 지렁이들은 변화가 감지되는지 땅 위로 막 기어오른다. 그곳이 시멘트인지 아스팔트 인지도 모르고. 갈 곳 잃어 말라죽을지도 모를 그 지렁이를 맨 손으로 집어 흙이 있는 곳으로 던져주는 어른이 있다는 거다. 숲길 산책의 묘미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징그럽기는커녕 이보다 깨끗한 것은 없다는데. 생각만 해도 그때의 꿈틀거림이 생각 나 몸서리쳐지는 데 말이다.


꼬챙이로 들어 올려 피신시켜주려다 위협으로 느낀 지렁이의 삶의 몸부림. 내가 더 많이 뒤틀었지 싶다.

‘얼른 흙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이곳에 오래 있으면 안 돼.’

맘 속 얘기만 건네고 밟지 않으려 조심하며 지나간다. 나무 사이 곳곳에 매달린 거미 또한 흉측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덜하지만, 동화책 속 등장인물 거미의 역할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긴 하다.


그 옛날 원효대사의 일화. 어두울 때 바가지에 담긴 물인 줄 알고 마셨던 시원하고 달콤했던 물이 다음날 아침, 해골에 담긴 물이었음을 알곤 바로 토가 올라오는 구역질을 해대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

모든 것은 맘먹기에 따라 달리 보이기도 달라지는 것도 맞는 모양이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애벌레를 만지며 놀았던 쪼꼬미들은 어떤 애벌레를 만나도 거리 김 없이 다가갈 거 같으니.


두껍고 딱딱한 껍질을 둥글게 뚫고 나온 애벌레의 이빨이 궁금해지긴 하다.  어느 사이 두텁게 덮혔던   내 편견의 껍데기도  어렵게  한꺼풀씩 벗겨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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