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비휘 Oct 24. 2021

가을배추, 무의 강제 졸업

기후 위기는 눈앞에 닥쳤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우주이고 자연이라더니 그래서 그런가. 생명을 품어 키우는 텃밭으로 가는 주말이 늘 기다려진다. 지난주 토요일 아침 그곳을 찾았을 땐 맑은 가을날,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텃밭 초입에 자리한 어르신 토란대를 베어내 삶기 좋게 정리하고 계셨다. 수북이 쌓인 걸로 봐선 제법 많이 심으셨던 모양이다.

“서리가 내리니 그 튼실하던 토란대가 폭삭 주저앉더라고요.”

작년 두 뿌리 심었던 토란대. 수확을 앞두고 한 주만 더 한 주만 더 보겠다고 아끼다 서리 맞고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던 때가 떠올라 말을 건네었다.

“아직은 서리 내리지 않았고, 때가 아니라 괜찮아요.”

어르신은 아직은 걱정할 거 없다며 하던 일을 계속하셨다. 주말 농장 한 복판에 토란을 심어놓은 그곳은 언제 수확하려나 조금 염려가 되었다. 우리처럼 될까 봐. 서리 내리기 전에 거둬야 할 텐데...


 어르신은 수확을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이 있어 수확을 서두른 거라셨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보니 그분의 촉이 남달랐나. 담 날 아침 64년 만에 가을 한파가 닥칠 거라는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주말 농장 중앙의 토란대는 염려대로 하루 아침에 풀썩 주저 앉아 있다. 다 키운 자식 같은 걸.


갑자기 큰 추위가 온 다음날, 유치원 아이들 모두 겉옷 차림이 180도 달라졌다. 한두 명 가벼운 가디건 정도 걸치던 겉옷이 일제히 꼭꼭 약속한 듯 두터운 외투로 바뀐 것이다.

가을 옷을 거치지 않고 두터운 외투라니 낯설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걸 바꿔 놓은 걸로 치자면 텃밭의 풍경도 마찬가지. 주인이 거둬들이지 않는 한 호박넝쿨은 계속 뻗어나갈 기세였다. 군데군데 아기 호박까지 매달고선. 가을 한파 한 번 훑고 간 텃밭은 전쟁이 끝난 뒤가 이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처참했다. 곳곳이 불타 없어지고 재만 남은 듯한.

 가을 한파가 오기 전까진 가을작물과 여름작물의 끝물이 어우러져 싱싱하고 푸릇푸릇함이 생기 있었다.

 배추와 양배추는 속 알을 채우느라 여념 없었고, 무는 덩치를 불려 나가던 중이었는데... 무, 배추가 가을 작물보다야 나은 상태라 해도 앞으로가 염려가 되었다. 무의 이파리가 얼었다 녹은 부분의 빛바램으로 인해 광합성 작용이 부족해 뿌리까지 양분이 덜 가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잎줄기채소인 배추는 잎이 문제가 생겼으니. 크다 만 키처럼 맘껏 못 자란 녀석들 수확해야 하는 건 아닐는지.


바람이 얼마나 세찼던지 고춧잎과 늦고추가 바람 부는 방향대로 부동자세다. 수확 못한 고구마순과 호박넝쿨은 멸종, 가지 이파리는 색이 바랬고, 매달린 작은 가지를 보고서야 가지 대였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여름작물들의 최후는 아이들 여름옷 쏙 들어가듯 자취를 감춰버렸다.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 연인처럼 서운하고 씁쓸했다.

텃밭 이웃이 이 정도의 맘인데, 주인은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을까. 지난 주말 아침에도 호박 이파리 수확해 가는 걸 봤었다. 또 새 잎이 나오면 호박 쌈의 아침상을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하루아침에 이파리 하나 남지 않은 호박 줄기와 마주해야 했으니.

가을작물이라고 해서 온전한 건 아니다. 여름작물의 끝물처럼 폭삭 주저앉지는 않아도 얼었다 녹은 부분은 고유의 빛을 잃고 시들시들해져 가고 있다.

지난주와 이번 주는 누가 봐도 before---after다.

정성 들이고 공들여 키우기는 여러 날이어도 무너져 내리는 것은 하루도 걸리지 않고 끝나버린다는 것을. 기후위기의 영향이라면 정말 무서운 거였다.


김장철도 아닌데, 배추와 무의 상태가 더 나빠질까 봐  여기저기 배추나 무들의 조기 졸업을 거행한 곳이 많았다.

우리 배추는 얼갈이만큼만 자라고 있다. 김장할 건 아니라서 조바심은 내지 않지만, 크지 않는 이유는 여러 곳에  있을 터. 가장 큰 이유는 여름작물을 거두고 충분한 퇴비를 하지 않고 어거지로 키우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거다. 이웃 분들처럼 거름을 하지 않고 모종을 심어 대기만 한 거다. 올해는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거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텃밭 이웃 분들은  배추와 무를 심기 전 거름부터 시작해 밭고랑을 두둑하게 쌓고 비닐을 덮어줌을 나중에 알았다. 모종에 덮여 다 똑같은 줄 알았던 거다. 지금껏 벌레 잡아가며 정성을 쏟은 생명들이 하루아침에 큰 피해를 입었으니 속상함은 말로 하지 못할 거다.


지난 주 텃밭 옆 까마중 이파리 위에  노린재 새끼들 오종종 올라 앉아 햇살 멍하는 걸 봤었다. 엄마 노린는 다른 이파리에 앉아 새끼들을 지켜보고. 가을 한파로 이파리가 다 얼고 까마중 열매만 덩그라니 남았던데, 어미와 새끼들 잘 피했는지...





진해 계신 울 시엄니 텃밭에선 김장 배추와 무가 엄청 잘 자라고 있단다. 울 주말농장처럼 그러면 김장배추, 무값이 엄청 비쌀 텐데, 다행이다 싶다.


울 텃밭의 얼갈이나 달랑무는 크든 작던 다 자란 거 같으니 졸업식을 거행해야 한다. 다친 손가락 실밥을 아직 풀지 않아 다듬기만 겨우 가능할래나. 솎은 것도 그이가 손질까진 해 왔다. 깨끗이 씻어 물김치라도 담아야 할 텐데... 얼음 땡 놀이하듯 얼음하고 있다. 식구들이 도와주고는 있어도 하나하나 다 모르니 할 일이 태산이다.



 배추, 무를 심은 지 100일은 지나야 저장용 김치로 아삭 아삭이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조기 졸업당한 녀석들, 쉬이 물러지지 말고 내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올 때까지 잘 익은 묵은지 역할까지 임무 완수 잘하길.


기후로 인해 농작물이 피해 입는 걸 보니 우리들 생명과도 바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거 같다. 그렇다면 기후의 온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는 일을 보태서는 안 될 거 같다. 나부터.




매거진의 이전글 구두 굽갈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