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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비휘 Nov 12. 2021

할머니, 정겨운 그 이름

늘 건강하세요.

앞서 걷는 사람의 걸음보다 속도가 저절로 줄여졌다. 뒤따르라고 말한 듯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득한 꿈속에서 본 듯한 모습이기도 하고 늘 생각 속에 그려 놓은 그림 같은 그 모습이 좋아서.


할머니와 일곱 살 남짓한 손자가 손잡고 걸으며 연신 이야기를 나눈다.

“할머니, 나는 이다음에도 여자로 안 태어날 거예요.”

“왜~?”

무슨 연유가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손자를 내려다 보며 할머니께서 물어보신다.

“아기 낳아야 하잖아요. 아기 낳을 때 많이 아플까 봐요.”

할머니께서 한참을 웃으시며

“우리 OO이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그 나이 때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고, 그런 말을 많이 들었던 것도 같아 마스크 속에서 키득득 나의 웃음도 새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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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같은 동네에 살아서 그런지 그 손자와 할머니의 다정함을 또 만났다. 자동으로 뒤따르며 걸음도 느릿느릿 앞사람의 보폭만큼 걷게 되었다. 역시 전과 다름없는 따스함과 정겨움은 그대로다.


손자가 길가에 있는 돌멩이에 관심을 보이며 만지고 있을 때 할머니께서 기다려 주고 계셨다. 늦었으니 빨리 가자. 그런 거 뭐 하러 만지냐. 그런 재촉이나 저지의 말은 전혀 없으셨다. 편안해 보이는 아이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할머니께서 말씀하신다.


버스 한 정거장을 사이에 두고 할머니랑 아이의 집이  있다셨다. 아이 엄마, 아빠 출퇴근시 데리고 오가는 길. 어린이집을 챙겨 보내기 위해 아침에 델러 가고, 하원한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 저녁에 델다 주고, 델고 오가는 길 할머니와 손자 모습을 내가 본 거였다.


한 정거장 거리를 매일 오가는 할머니와 손자. 몇 번 보지 않았지만, 아이가 칭얼대거나 짜증내지 않고 안정감 있어 보이는 저건 할머니의 말씀에서 묻어나왔다.

아이가 불쑥 생각나는 말을 던지면 따뜻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대답해 주시고, 꽃과 나무를 보여주시려 하는 모습.

 스르륵 나도 모르게 어릴 적 우리 집 할머니가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줄곧 같이 사셨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꼬부랑 할머니셨다. 논일이나 밭일을 한 적 없으신데, 허리가 굽으시고, 매일 이가 가지런한 잇몸을 목으로 꿀꺽 삼키셨다. 그런 줄 알았다. 물이 담긴 그릇 속에는 할머니의 가지런한 이와 잇몸이 또 담겨 있는 것이 신기했다. 요술부리는 마법사 같았다. 꿀꺽 삼켜도 매일 하나씩 그릇 속에 생기는 그것.

나중에야 그것을 목으로 삼키는 것이 아니라 잇몸에 쏘옥 맞춘다는 걸 안 건 한참 후였을 거다.


오물오물 이 하나 없는 할머니가 외출을 위해 준비하신다. 가지런한 새 하얀 이와 잇몸을 꼴딱 삼키시고 한 주먹도 안 되는 긴 머리를 참빗으로 빗고, 돌돌 감아 올려 비녀를 꽂으시면 머리 단정 끝. 한복을 입으시면 내가 앞장섰다. 할머니의 외출 보디가드는 막내인 내 담당. 할머니는 고운 단장을 하시고 막내딸네  집으로 가시는 거였다. 지팡이를 짚는 할머니의 걸음에 맞춰 나도 같이 걸었을 테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테다.


잊고 있었던 오래된 기억 속의 그 모습이 앞서가는 저 사람들과 어딘가 닮아있어  내 걸음의 보폭도 줄였나 보다. 몸이 기억하는 그 모습. 막내딸인 고모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난 할머니를 모시고 또 집으로 돌아왔을 터. 그 땐 할머니랑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왔을까.


지팡이를 의지해 잘 걸으시던 할머니가 어느 날, 몸 져 누우셨고 매일 토하다보니 몸이 앙상하게 마르셨다. 돌아가시는 날을 알기라도 한 건지. 힘없는 목소리로 나랑 같이 자자고 하셨다. 살이 쏘옥 빠진 할머니가 그 때는 무서웠다. 많이 어렸었나 보다. 그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나중엔 생각이 많이 났는데, 그것마저도 잊고 살았다.


할머니와 손자가 나란히 손잡고 정감 있게 걷는 모습을 보노라니 어릴 적 할머니와 기억이 큰소리로 ‘너 나와!’ 소리쳐서 불러낸 듯 따라 나왔다.


앞서 손자와 걸으시는 할머니. 아프시지 마시고, 손자 곁에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두 손 모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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