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해서 집에 오니 거실 진열장 위에 낯선 봉투가 놓여 있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안의 정체가 한눈에 보였다. 한 해를 매듭지을 때가 됐다며 보내는 신호등. 매일 그 날이 그 날 같을 텐데, 한 번씩 쳐다봐 주고 짚어봄으로써 정확한 날을 알 수 있는 2021년도 달력. 밋밋한 하얀 봉투와는 달리 겉봉투에서 풋풋한 사랑과 정겨움이 묻어났다.
내년 2021년 컨셉은 ‘With POSCO 함께여서 더 좋은 날’
옹기종기 기와집이 모여 있는 시골길에 초록 풀 향기 맡으며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연인이 말해준다.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건 사랑이라고. 뒷자리에 앉은 그녀의 앞사람 허리를 꽉 감싸 안음이 바퀴를 굴리며 나아가는 이의 콧노래를 절로 나오게 할 그림이었다.
나는 어느새 미끄러지듯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몸치 굼치 어둔하고 몸동작이 재빠르지 못한 말을 다 갖다 붙여도 모자라는 나였다.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던 K는 나와는 완전 다른 여전사처럼 보였다. 남자아이들과 싸움에서 뒤지지 않는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여자 사람 친구였다. 친구들과 편을 나눠서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자치기, 구슬치기, 말뚝박기, 단방구 등 어떤 놀이든 가위바위보 선수로 나섰다. 자기편을 뽑아가는 선수가 되려면 누가 봐도 힘이 세야 한다. K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기든 지든 가장 먼저 나를 뽑아갔다. 같은 편에 데리고 간들 이기는 게임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을 텐데, 나는 K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있었다. 저항 못하는 나를 막무가내로 잡아 뜯어 순식간에 아웃당할 것도 K여전사 뒤에 붙어 있으면 안전했고 든든했다. 금방 죽어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짐을 실어도 될 어른 자전거를 몰고 겨우 닿는 발을 굴리며 K여전사는 내 앞에 당당히 나타났다.
나에게 뒤에 타라고 손짓을 했다. 무서운데, 자기편으로 뽑아주는 여전사를 믿고 올라앉아 허리를 꽉 부여잡았다. 내 무게 때문인가. 비틀비틀 대더니 어어~~얼마 못가 전봇대에 곤두박질쳤다. 둘 다 팔다리 부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피멍과 타박상으로 꽤 오랫동안 절룩거리며 다녔다. K여전사는 그 후에 더 씩씩하게 짐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K여전사가 타라는 눈빛을 보내기 전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시는 타지 않겠다는 신호를 미리 보낸 거였다.
그 겁 많고 어린 계집아이는 자전거를 타지도 배우지 못한 채 시집을 갔다.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같이 가고 싶은 로망이 있었나(?) 그이는 몸치인 나를 끌고 자전거를 배워 주겠다고 데리고 나갔다. 가까운 초등학교 운동장에선 비틀비틀거리다 조금 앞으로 나아갔다. 학교 운동장에선 제대로 배울 수 없다며 도로로 데리고 나갔다. 아직 그럴 수준이 아니라는 걸 나만 알았나(?) 사람이 다니는 인도인데, 보기와는 다르게 울퉁불퉁했다. 앞을 보면 아래가 투둘투둘거리고 밑을 보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진퇴양난은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싶다.
나의 몸치와 그이 기대치가 어긋나도 한참 빗겨 나 있어 자전거 전수는 거기서 끝.
훗 날 자전거 타기는 2인용으로 대신했다. 독립된 자리에 각자 앉아 나는 발만 올리면 되는 거였다. 돌아가는 대로 두 발을 맡기면 되는 자전거 타기. 아쉬운 게 있다면 뒷자리에 앉아 그이의 허리를 감싸 안는 그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말이나 휴일 한강이나 야외로 지나다 보면 완벽한 복장을 갖춰 입고 자전거 타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언제 다시 도전해 볼 수 있기나 할까?'
그땐 저 그림 속의 연인들처럼 지금은 감싸 지지 않을 허리 옆구리라도 부여잡고 달려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