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 일을 40년 가까이 파고 지금도 그 현장에 몸담고 있는 분 앞에 서면 경건하고 숙연해진다. 적어도 그 일에 대한 책임감과 건강한 자기 감이 없으면 그리 오래 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부동산 일을 하면서 정말 귀한 분을 뵈었다. 어제 밤늦은 시간 잠깐 봤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사무실의 지도도 낡아있고, 연세가 많으신 분이 아직 일하고 계시는구나 정도였다.
전세를 살던 곳에서 갑자기 쫓겨나다시피 한 여대생의 집을 알아보다 중개인으로 일하시는 부동산 사무실까지 공동중개로 오게 된 거다. 어젯밤 늦은 시간 계약할 집을 봤었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 사진을 보내드렸을 텐데, 낮 시간에 문자로 조목조목 보낸 내용을 한 번 더 살펴보고 여쭤보고 결정하라셨단다. 왜 안 그럴까. 멀리 보낸 20대 초반 딸아이를 서울 땅에 혼자 보낸 부모라면 아주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여대생 엄마 맘으로 빙의되어 더 꼼꼼하게 살피게 된다. 여대생 혼자 지낼 방 주변 창문이나 출입문 등 안전을 우선으로 챙기고,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점검을 끝냈다. 마지막으로 본 계약 날은 따로 정하고 계약금 일부를 보내기 위해 물건지의 사무실을 찾은 거다.
시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인가. 어젯밤 같은 사무실이건만, 오후 시간 들리니 새롭게 다가왔다. 어젯밤 고리타분해 보이던 게 중개 박물관처럼 다시 보이는 것이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 때 묻은 매물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컴퓨터로 매물 작업하는 요즘 사람들과 달리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기록의 힘이 날 압도하며 갑자기 친정아버지가 떠올랐다. 해마다 새롭게 받은 두꺼운 전화번호부 새하얀 달력으로 표지를 입히셨다. 30cm 자로 한 줄씩 그어 중요한 사람 순인 듯 낯익은 이름이 위로 힘찬 명조체의 글씨체 번호를 적어 내려가던 아버지가 떠오른 거다. 비슷한 상황을 접하면 그와 같은 일이 이리 갑자기 소환된다는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 좋은 마음으로 하루하루 잘 살아야 불쑥 떠오른 생각도 마음을 뒤흔들지 않고 중심 잡고 가겠구나.
우리도 노트에 매물장을 쓰긴 하다. 전화나 방문 손님이 급히 물건을 찾거나 내놓으러 오셨을 때 불러 주는 대로 빠르게 받아 적을 때는 글씨가 개발새발이다. 물건의 종류 아파트, 단독, 다가구, 다세대, 상가, 공장 창고들 중 매매, 전세, 월세로 나눠 받고 싶은 가격 등 조건을 불러주시는 거다.
어르신은 뭘 하나 적으실 때 정성 들여 받아 적는 모습에서 느림의 미학이 느껴졌다. 곁에서 소일거리 삼아 도우시는 아내 분이 말씀하신다.
“워낙 정확하신 분이라 40년 가까이하면서 중개사고 한 번 없었~어.”
남편이 자랑스러운 듯 말씀하시는 아내의 말을 곁에서 듣던 어르신!
꼭 일러줘야 할 게 있다는 듯 후배 중개사에게 힘주어 말씀하신다.
“중개사고, 그거 조심해야 혀. 위험하거나 꺼림직한 물건은 아예 취급을 안 했어. 이것저것 가리다 보니 돈 많이 벌진 못해도 지금까지 일하는 게 정말 좋아. 사고가 있었거나 돈 많이 벌 욕심이었다면 일 할 수 없었겠지?”
그 분야 장인 취재 나온 기자처럼 묻고, 하나하나 질문에 대한 답을 정성껏 해 주셨다.
잘못해서 몇 십억을 물어줘야 했던 친구 분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덜컥 겁이 나면서 정말 꼼꼼하게 공부해 나가야 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40여 년, 그 자리서 일 한 뒤안길 돌아보셨을 때. 아이들 건강하게 잘 자랐고, 건강 허락하는 동안 일하는 지금 감사하시단다. 무엇보다 두 분 같이 아침 일찍 향하는 일터가 있어 좋다는 거다.
하시는 일 귀히 여기며 투철한 책임과 자부심이 기록과 말씀에서 묻어나고 배어있다.
“내가 사십 될 때 시작했거든. 나이 드신 어르신이 동네 사랑방처럼 하실 때라 저 집이에요! 하면 끝났어. 패기 넘치는 젊은이 들어와서 일거리 줄었단 말 많이 들었어. ㅎㅎㅎ 내가 그 말 하는 위치가 됐네. 젊은이들 휴대폰과 컴퓨터로 다 해결하잖아. 나는 손으로 쓰는 게 익숙하고 편한데...”
40년 가까이하신 습관이라 왜 안 그러실까. 어르신보다 한참 나이 적은 나도 신문물이 이리 힘든데, 지금까지 어렵네, 못 따라가네 했던 말은 징징거림 어리광에 불과했던 말이던가.
팔십 다 되신 어르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씀 잘 들으며 다시 한번 돌아본다. 복덕방에서 일하셨던 분들
제대로 알지 못하며 가벼이 여겼던 지난날은 없었는지 무지의 나를 들여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