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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Jul 12. 2021

골목 끝에서 마주한 어린회상

골목 끝에서 마주한 어린회상


지난 일요일에는 오랫동안 벼리고 벼리던 화전동 벽화마을에 다녀왔다. 동쪽에는 봉산, 북쪽에는 망월산이 있고, 서쪽에는 창릉천이 흐르는 화전동. 예부터 이 지역에 각종 꽃들이 많아 꽃밭을 이루었다 하여 화전리라고 불렸다. 1992년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화전동이 되었다. 화전동은 2011년부터 2017년도까지 꽃길, 동화길, 힐링길 등 여러 테마의 벽화를 그려 조성된 벽화마을이다. 런닝맨도 이곳에서 촬영했었다.

나는 옛 마을 정취가 남아 있는 마을을 탐방하는 것을 좋아한다. 좁고 여러 갈래의 길을 가진 골목길을 걷노라면 왜인지 따뜻하고 푸근하다. 도시계획으로 잘 닦인 반듯한 도로 위를 자동차로 걷는 삶을 살다보니 골목길은 중년인 내게는 추억이 되었고 젊은이들에게는 역사가 되었다. 

비를 품은 뙤약볕이 내린 주말 한낮의 화전동은 조용했다. 생뚱맞게 찾아온 이방인에 대한 낯선 시선도 없이 다정다감했다. ‘왕년엔 우리 마을이 인기 좀 있었지.’ 이런 추억 어린 표정이 엿보였다. 인적이 드물었다. 요즘은 찾는 이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을 사람도 방문객도 없는 이 적막은 오히려 빛바랜 화전동에 어울리는 가장 중요한 구성물처럼 생각되었다. 퇴색되고 늙어 가는 마을, 빛바랜 벽화, 저물어 가는 노인들, 이 조합이 삼단 콤보를 이룬 듯 어울렸고 편안했다. 

마을에는 비좁은 골목길 양편으로 노년의 나이에 접어든 옛집들이 깨복쟁이 친구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었다. 옛 집들은 저마다 긴 세월동안 쌓아온 자존의 아우라가 넘쳐 있었는데 팔짱을 낀 포즈로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거나, 옆 친구의 어깨에 고된 몸을 실어 기대어 서거나,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넉넉한 관조의 미소를 품고 있었다. 마치 에피쿠로스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그리스 섬의 노인들처럼 보였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어느 집 처마 밑에 제비집이 보였다. 어미 제비가 새끼 제비를 돌보고 있었다. 이 시대에 처마 밑에 제비집을 짓는 제비가 있다니. 위기에 놓인 자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곳이라면 자연회생의 가능성을 기대해도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벽화보다 마을이 품고 있는 분위기에 더 반해서 골목과 골목으로 연결된 옛집 사이사이를 누비었다. 오랜 시간의 발걸음이 다져져 만들어진 화전동 골목길은 벽화와 주민들이 내어놓은 화분과 정성들여 가꾼 정원들, 하물며 야생화와 들풀까지 정겹게 어우러져 있었다. 하얀 담에는 들풀이 난을 쳤다. 구름이 된 그림은 난로 배관 위에서 연기로 피어올랐다. 마치 자연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우리의 미래처럼 보였다. 이곳이 오래도록 남을 수 있게 허락하는 세상이라면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살게 될 날이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낮은 언덕 같은 화전동 마을을 스렁스렁 걷다 보니 내 어린 시절 우리 동네 원석전리 골목길이 생각이 난다. 어린 내게는 신작로 만큼이나 넓었던 길. 나는 그곳에서 자전거를 배웠다. 다른 여자애들이 자전거를 잘 타는 것이 부러웠다. 마침 우리 집 앞 골목길에 어른 자전거가 보였다. 나보다 너무 커다란 짐 자전거는 조금 위협적으로 보였지만 타보고 싶었다. 언니에게 잡아 달라고 부탁하고 몇 번을 시도하여 중심을 잡고 몇 발자국 앞으로 굴러갈 수 있었다.

자전거 연습을 했던 골목길을 쭉 따라가면 우리 동네 보호수 정기나무가 나온다. 정기나무를 지난 길 끝에는 강이 있었다. 우리는 그 냇가에서 여름이면 조개를 줍고 멱을 감았다. 언니들의 빨래터도 되었던 것 같다. 나도 작은 그릇에 걸레를 넣고 따라 나섰던 기억이 몽글몽글 떠오른다. 그때는 어른의 일을 따라 하는 것이 우리의 놀이였다. 소꿉놀이처럼. 우리는 그 강을 ‘냇가랑’이라 불렀다. 냇가랑에는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아카시아나무로 온 숲을 이룬 월산리가 나온다. 나는 그 다리가 너무 무서웠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쳐 다리가 잠기기도 했고 다리 밑 물살이 검푸르게 거세지기도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다리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리에서 조금만 발을 헛딛여도 강물 속으로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웃마을 월산리는 내게는 미지의 세계였다. 

나는 아침마다 그 공포의 다리를 손쉽게 건너서 우리 마을 학교로 건너 오는 아이들이 무척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저학년즈음같다. 월산리에 사는 친구가 자기네 마을에 놀러가자고 해서 따라가게 되었다. 보호자 없이 처음으로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나는 그날 하얀 포도송이 처럼 매달려 있는 아카시아 꽃을 처음 보았고 새큼한 아카시아 꽃 맛도 처음 알게 되었다.

월산리는 어린 아이의 걸음으로는 너무 먼 거리였다. 갈 때야 친구를 쫓아 신나게 갔었는데 어둑해진 저녁에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 무서웠다. 지금도 검푸르게 급 물살이 흐르던 다리 밑의 어린 아이의 공포심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제는 어린 내가 길에서 마주 했던 공포의 시간도 그리움이 되었다. 이렇게 회한과 그리움으로 나의 유년기를 회상하며 골목길을 천천히 걷다보니 마음속에 포근함이 뭉근하게 자리했다. 나는 화전동 골목길을 스렁스렁 거리며 ‘이곳에서 살고 싶다’라는 용기 없는 목소리만 자꾸 목구멍으로 삼켰다. 이곳에는 어린 나와 젊었던 우리 부모님이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 그립고 그리운 화전동 마을이 오래도록 버텨주길 주문처럼 외우며 걸었다. 그래야만 젊었던 우리 부모님과 함께 했던 내 유년시절이 더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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