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제7회 고양국제무용제
지난 한 주는 ‘고양국제무용제’ 공연 관람으로 분주했다. 고양시 sns기자로 활동하는 나는 취재 목적으로 보게 된 공연이었다. 무용제는 5일동안 진행이 되었다. 3일간의 공연과 하루 동안의 워크숍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날 공연은 고양안무가 초대전이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도시불빛’ 축하 공연으로 무대의 서막을 열었다. 서울발레시어터 무용수들이 붉은 부채를 들고 플라멩코 리듬에 맞춰 스페인 투우사처럼 강렬하게 짠하고 등장하자마자 나는 이미 재미있어졌고 앞으로 남은 시간도 재미있어질 예정이었다. 현대무용이라는 예술장르가 벌써 이해되는 것 같았다.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와 이해도 없이 공연을 보았지만 무용수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말보다 흡수력이 더 빠른 언어가 몸의 언어라는 생각을 했다.
두번째 날, 국제교류안무가 초대전으로 아트프로젝트보라의 ‘실리콘 밸리’와 멜랑콜리 댄스컴퍼니의 ‘위버멘쉬’는 극찬을 아끼고 싶지 않을 만큼 내가슴을 뛰게했다.
‘실리콘밸리’는 21세기 디지털시대를 시각적으로 표현한것이라 했다. 이스라엘 출신 ‘샤하르 빈야미니’와 아트프로젝트보라의 협업으로 오래된 것과 새로움 사이, 현실과 상상 사이, 인간 신체와 사이버 신체 사이 등 피조물 간 경계선 상에서의 관계를 이야기한것이라 했다. 파격적인 무대였다. 누구는 공포스러웠다고도 했다. 그 공포의 느낌이 나에게는 판타지 게임영상처럼 너무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인간의 관절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보는 것 같았다. 무용수들의 몸이 끈적한 젤리액이 되어 무대위를 끈적하게 흘렀다. 실리콘밸리의 가장 큰 매력은 남.녀가 평등하다는 점이다. 남녀의 역할이 따로 없었다. 여자도 남자도 가슴을 가리고 다리가 노출된 똑같은 의상을 입고 춤을 춘다. 이렇게 놓고 보니 남자와 여자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똑같은 인간종으로 보였다. 특정한 주인공도 없다. 모두가 똑같은 동작을 한다. 그렇지만 제각각의 표정과 느낌으로 자신의 개성을 강렬하게 들어낸다. 모두가 같지만 달라서 더욱 특별했고 아름다웠다.
아… ‘위버멘쉬’. Richard Strauss(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웅장한 음악과 함께 6명의 사나이가 등장한다. 커피잔을 들고 책과 서류가방을 들고 스마트폰을 보며 런닝머신위에서 달리고 또 달린다. 초인적인 힘으로 쉬지 않고 끝없이 달린다. 앞사람을 밀어내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경쟁사회의 현대인을 그린다. ’위버멘쉬’는 불안과 고뇌로 가득한 현실의 한계를 극복 하려는 이 숨가쁜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렇게 숨가쁜 순간에서도 서로가 커피와 서류 가방을 주고 받고 소통을 하며 위태 위태한 위기들을 잘도 넘긴다. 멜랑콜리댄스컴퍼니 정철인 예술감독과 5인의 무용수의 빠르게 연결되는 몸의 움직임은 과히 초인이 아니면 가능할 수 없는 현대적 감각의 퍼포먼스였다.
무용제는 알지 못했던 또다른 예술의 세계에 나를 매료시켰다. 무용은 말이 아니라 몸의 언어이다. 리듬에 맞는 동작을 창작해내는 대중적인 춤과는 조금 다르게 이해된다. 무용은 리듬에 맞는 동작 뿐 아니라 예술적 서사를 표현해야 한다. 서사가 담긴 음악과 몸짓과 표정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온 몸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또한 무용은 다양한 콘텐츠와 예술적 요소들을 품은 종합예술이다. 음악, 무대와 조명, 스토리, 의상과 무용수의 감정에서 연결되는 육체의 관절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예술이다. 단순히 몸의 움직임 만을 사용해서는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다. 무용 또한 모든 예술적 요소들의 종합창작물이다. 물론 이 모든 조합을 만들기 위해 훌륭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안무가가 필요하다.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소설을 쓰는 작가처럼 말이다. 그리고 대서사를 이끌어가고 춤(글)을 보다 아름답게 구성하는 예술감독(편집자)도 필요할것이다.
나는 몇년 전 국립 해오름 극장에서 있었던 국립무용단의 전통무용 ‘향연’을 보았다. ‘향연’의 무대를 볼때도 무대예술의 황홀함과 무대의상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무용도 종합예술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무대에 오르는 창작물은 혼자서 독보적으로 빛날 수 없는 것 같다. 안무가와 무용수가 만들어 낸 창작품을 더 힘있게 연주하는 지휘자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