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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Oct 17. 2021

공원에서 글 줍기

공원에서 글 줍기


06시 30분. 눈은 떴는데 잠자리를 개운하게 털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운동을 가야 한다? 아니면 간밤에 잘 풀리지 않았던 글을 이어 쓴다? 라는 갈등으로 머뭇머뭇 거리는 사이, 나는 어젯밤보다 말았던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때마침 드라마는 실연을 당한 여주(여주인공)가 한동안 실의에 빠져 살다가 다시 힘을 내기로 마음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여주는 ‘이제 정말 정신 차리자.’ 라며 힘을 내고 쓰레기장을 방불캐 하는 자기 집을 말끔히 치우고 으랏차차! 다시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다시 열심히 살아간다. 여주가 힘을 내는 모습에 나도 절로 각성이 들었다.

‘나도 정신 차려야지.’

07시. 으랏차차! 나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볼품없이 마아악… 헝클어진 히피 머리를 모자 속에 겨우 구겨 감춘다. 주방으로 가서 갑상선 저하증 약 한 알을 삼키고 어제 내려 둔 커피 향이 모두 날아간 식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남은 커피는 텀블러에 덜어 담는다. 그리고 핸드폰과 자동차 열쇠를 챙겨서 운동화 끈을 조여 묶고 현관문을 나섰다. 여주가 집안 청소를 하며 힘을 냈듯 내게 오늘 하루를 힘 있게 살게 만들 곳으로 나서기 위해서다.

아침 공기는 상쾌했다. 하루를 아침 운동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이다.  때론 삶의 해답 같은 것을 이 아침에서 발견하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나는 오늘도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항상 나와 반대방향으로 걷는다. 그래서 호수를 중심으로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 공원을 열심히 걷다 보면 꼭 그녀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몇 년 전 처음 보았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어깨도 튼튼하게 펴져있고 야윈 다리도 훨씬 힘이 있어 보였다. 그녀는 매일 아침을 오늘처럼 걸었을 것이다. 공원에 드문드문 나오는 내가 매번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오늘은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녀의 삶이 생그러이 반짝거렸다. 나의 아침도 반짝거렸다. 그녀도 나를 알고 반갑다는 생각을 할 것만 같다. 공원의 아침은 세상을 반짝이게 하고 새롭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어제의 낡은 나를 잊고 오늘의 새로운 내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나는 아침과 함께 떠오른 오늘의 새로운 나를 맞았다.

그녀도 나도 또 다른 사람들도 이 아침을 걷는다.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세상을 걷는다. 누구라도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평등한 공간. 공원은 내 삶에서 가장 평등한 곳이고 자유가 허락된 곳이다. 다리가 불편해도 삐딱하게 걸어도 느리게 걸어도 마라톤을 해도 자전거 페달을 구르며 쏜살같이 지나가도 되는 누구에게나 허락된 공간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잘 차려진 공공의 만찬이다. 모두가 저마다 다르고 자기의 속도로 걷고 있지만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평등하고 평화가 있는 곳이다.

이른 아침을 걷다 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강한 에너지를 느낀다. 하루를 건강하게 시작하는 사람들의 기분 좋은 에너지를 얻는다. 자기 삶을 지키는 일은 특별하고 거창한 무엇이 아니다. 그녀가 걷는 이 아침의 한 걸음, 겨우 한걸음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걷다 보면 튼튼한 다리를 갖게 되고 튼튼한 마음도 갖게 된다. 걷다 보면 생각도 모인다. 나는 공원을 걸을 때마다 많은 것들을 떠올린다. 참 이상한 일이다. 걷기를 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내가 걷는 길 위로 함께 따라온다.

일산 호수공원은 일직선 러닝 코스가 4.7km. 나는 호숫가 쪽으로 조금 돌아서 걸으니 한번 걸을 때마다 5km 정도를 걷는다. 시간은 1시간 이내로 소요된다. 나는 그 시간을 걷는 동안 많은 생각들을 떠올린다. 대개 일상에서 겪었던 심리적 갈등이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이야기는 순하게 필터링이 되어 어떤 깨달음과 삶의 이치 같은 것을 남겨 준다.

40대 초반, 하루에 3-4시간씩 공원을 걸을 때가 있었다. 나는 그때 떠오른 상념들을 SNS에 기록하기도 했다. 그 재능 없는 기록이 시로 둔갑되어 노동 예술제에서 두어 번 상을 받아 상금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빠른 걷기를 하고 있지만 그 시기에는 생각하기 위해 느리게 걸었다. 우울을 만끽하려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그 우울의 시간을 사랑했던 것 같다. 우울해지기 위해 우울한 생각을 하고 그 우울을 글로 적고 싶어 했다. 우울의 늪에 깊이 빠진 내 감정을 사랑했다. 나는 요즘도 공원을 뱅글뱅글 돌며 생각을 떠올린다. 아니 애써 생각을 떠올리지 않아도 그냥 떠오른다. 걸으면 저절로 생각이 나를 찾아온다. 나는 걸으면 왜 어김없이 머릿속도 함께 걷게 되는지 정말 희한했다.

몇 년 전 가족끼리 오대산 선재길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선재길은 흙, 돌, 나무, 물을 밟으며 걸을 수 있는 치유의 숲길이다. 동자길이라 하여 자기를 찾아가는 불도의 길이다. 가만 보면 불자도 니체도 걸으며 도를 닦고 철학을 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산티아고와 같은 성지순례의 길을 걸으며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생각을 정리한다.

‘사람들은 왜 걸을까.’

나는 걸음과 두뇌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날들을 걸으며 깨닫기를! 불자나 철학자들의 사유의 비법을 알아챈 느낌이다. 걸음을 걷다 보면 뿌옇고 흐렸던 두뇌가 생기를 찾고 갇혀있던 생각들이 내 발끝에서 가슴으로 줄줄이 따라 올라 나온다. 가슴이 햇살처럼 펴지고 마음은 더 단단해진다. 단단해진 마음 안으로 흩어진 생각들이 모인다. 홀로 걷다 보면 어느새 타자에 의한 가벼운 외로움은 사라지고 내가 나를 만나는 긴밀한 고독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그 고독한 시간은 생각을 말랑 하게 정리해주고 글의 영감을 주기도 한다.

8시30분. 나는 오늘도 주섬주섬 공원길에 떨어진 글을 주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고 심리적 고통으로 막막해진 사람이 있다면 공원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일이다. 몸과 마음도 건강해지고 생각도 모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될 테니까.  (10.15.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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