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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Nov 01. 2021

‘흰’ 자작나무 숲에서

자기돌봄 - 내 안에 '지중해' 있다

나는 ‘연애의 맛’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자작나무 숲을 보았다. 드라마 속 멋진 남성의 역할을 주로 했던 남자와 여자의 첫 만남을 가진 곳이 이 곳 눈내리는 자작나무 숲이었다. 이국적인 북유럽 감성의 하얀 숲과 하얀 파카를 입은 여자가 하얀 자작나무와 잘 어울렸다. 그 ‘흰’ 숲을 보며 나는 낭만과 로맨틱한 감성을 느꼈다. 나도 눈내리는 하얀날에 ‘흰’ 숲에 가보고 싶었다.


남자는 의외로 ‘연애의 맛’을 1도 모르는 투박함이 있었다. 첫 데이트에서 여자를 산으로 데려 오다니. 여자는 불편해 보였고 추워보였다. 아니 어쩌면 여자도 나처럼 남자의 낭만적 성향에 흡족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내가 걷는다면 쉬울 길이라 생각 되었다. 나는 걷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으니까. 추위는 옷을 단단히 여미면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화면에서 보이는 추위와 불편함보다 가보지 않은 ‘흰’ 숲에 대한 낭만과 판타지가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자작나무 숲에 가보고 싶어.'


지난 겨울, 남편은 눈이 내려 안된다, 길이 막혀 못간다, 너무 춥다, 를 핑계대며 나를 데려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야,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날에 아들과 동반하여 걷게 되었다. 우리는 자작나무숲 아래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웠다.


'흰.'


내가 상상했던 판타지는 보이지 않았다. 내 속마음을 알아챈 듯 주차를 돕던 할아버지 한분이 넌지시 당부의 말을 했다.


“자작나무 숲은 바로 앞에 없어요. 정상까지 올라가야 볼 수 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작나무숲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없다고 투덜댔던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숲에 들어서자마자 당장에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일까. 아마도 사람들은 사진속에 보이는 넓고 완만한 하얀 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자작나무 숲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산아래서도 당장에 볼 수 있는 ‘흰’ 숲을 연인과 손을 잡고 가볍게 걸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흰’ 숲은 쉬운 곳에 있지 않았다.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길은 어느 산의 정상을 정복해야 하는 것 처럼 고통스럽고 힘들지는 않았지만 꽤 까다로운 길을 걸어야 했다. 자작나무 숲을 만나는 길이 쉽고 만만하다고 지레 짐작했던 사람에게는 분명 좌절의 마음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자작나무 숲의 본 모습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사진에 보이는대로 존재할거라고 생각해왔는지 모르겠다. 숲이 나의 판타지대로 존재하길 바랐다. 남자와 여자가 경춘선을 타고 찾았던 그 낭만의 숲이 내가 상상했던 순결한 ‘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언제 어느때 가더라도.



하얀 눈이 쌓인 길을 털이 폭신한 부츠를 신고 하얀 파카를 입고 걸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나는 이 길을 너무 일찍 와 버렸다.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숲에는 눈은 없고 여름 끝의 푸르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 곳을 겨울에 오고 싶었다. 사진에서 본 자작나무 숲은 너무도 희어서 눈내리는 날과 아주 잘 어울렸으니까. 아무도 걷지 않은 자작나무 숲을 내가 맨처음 걸어 보고 싶었다. 그 하얗고 포근한 눈이불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검은 진흙에 엉켜 금새 더럽혀지고 팍팍하게 사그라들지 뻔히 알면서도. 순수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처음 걷는 자의 것이며 처음이 지나면 이미 퇴색되고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서 내가 처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나는 이곳에 오고 싶었다.


자작나무 숲은 ‘흰’이다. 참으로 희다. 푸름으로 존재해야 마땅할 것 같은 산이 푸르게 희다. ‘흰’이 주는 상징성때문인지 연인들이 두 손을 맞잡고 걷는 숲이 되었다. 사랑은 ‘흰’이어야한다. 언제나 영원히 지속되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도 ‘흰’도 너무도 짧은 시간안에 그 의미를 잃고 만다. 변색되어 순수함을 잊는다. 우리는 ‘사랑했다’ ‘사랑하고 있다’ ‘사랑할 것이다’를 밤낮으로 외치고 있지만 정작은 진짜 사랑은 없다. 아주 잠깐의 순결한 시간을 제외하고 선. 갓 태어난 ‘흰’을 지키기 어려운 것처럼 세상엔 변색되어 거짓된 사랑만 넘친다. 빛바랜 마음을 사랑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다. 아주 모호한 감정속에서 아주 미묘한 갈등들을 부득부득 사랑이라 우기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순수성을 믿고 싶고 믿어야만 살아 갈 수 있는 우리들처럼.


자작나무 숲은 하얀 지붕으로 산을 덮고 연신 ‘흰’ 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다. 물길도 따라가고 허벅지에 불끈 힘을 주며 계단과 언덕을 올랐고 돌탑앞에서 가족의 안녕을 기도하며 잠시 숨을 돌려야 했다. 다시 힘을 내고 쉬고를 반복하며 푸르스름하고 불분명한 색을 모두 품고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자작나무의 ‘흰’ 숲을 볼 수 있었다. 정상에 올라 본 자작나무 숲도 명징한 순수성을 져버린 사랑처럼 내가 생각했던 ‘흰’의 판타지는 아니었다.


 푸르름을 띈 ‘흰’ 숲. 숲도 변화를 겪고 있었다. 하얀 겨울로 가기 위해 봄과 여름과 가을의 과정을 충분히 겪고 아픈 기억과 상처를 지워가고 있었다. 비로소 자기를 찾아가는 푸르른 ‘흰’ 숲이 아련해 보였다. 발아된, 성숙된 자기형성의 과정처럼 보였다.


우리는 정상으로 가는 길을 걸어야 비로소 볼 수 있는 ‘흰’ 숲처럼, 모든 과정을 걷고 겪고 나서야 진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거룩한 사랑의 마음인지, 위선의 마음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연인들의 사랑처럼 첫 마음의 순수함은 지극히 짧은 순간일지라도 결국에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그 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긴 인생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부모와 자식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유착된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다투고 화해를 반복하며 지금 자작나무 숲 정상에 함께한 우리들처럼.


자작나무 숲은 내가 상상했던 판타지대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만의 성숙된 풍경을 품고 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모든 것을 품고 결국에는 자신으로 발아하는 빛나는 순간을 위해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작나무 숲의 겨울처럼 인생의 모든 순간이 ‘흰’으로 존재하지는 못한다. 지난한 계절의 과정들을 걷다보면 ‘흰’과 푸름과 붉음을 거치게 된다. 인생이 모두 ’흰’(순수)이 목표가 될 필요는 없지만 온전한 ‘흰’ 자작나무 숲의 판타지를 그리며 그 지난한 과정을 견디어 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비록 ‘흰’에 근접하지 못하더라도 결국엔 그만의 가치있는 삶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자작나무(East Asian white birch) : 한반도의 함경북도 높은 지역에 분포하고 남한에는 자생하지 않는다. 나무껍질은 광택이 나는 흰색으로 종잇장같이 옆으로 벗겨진다.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그림과 도산서원의 목판은 자작나무를 재료로 이용하였다. 약용, 관상용 등으로 이용한다. 인제 자작나무 숲은 원래 소나무 숲이었으나 솔잎흑파리의 피해로 벌채한 후 1989~1996년에 거쳐 약 70만 그루의 자작나무를 심었고 2006년부터는 유아 숲체험원으로 운영・관리 되면서 sns 등 온・오프라인을 통해 알려기지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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