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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Dec 18. 2021

내 목소리

내 안에 ‘지중해’ 있다


어릴때의 나는 노래를 꽤 잘하는 편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우리 담임은 방송부 선생님이셨다. 어느 날 담임은 우리 반 모두에게 일일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조회시간에 따라 부를 애국가를 녹음할 학생들을 선정하기 위해서였다. 내 차례가 되어 나도 노래를 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목소리가 높이 올라갔다. 그리하여 나도 애국가를 녹음할 기회를 얻었고 조회시간마다 내 목소리가 담긴 애국가가 운동장에 퍼졌다. 나는 5학년 때만큼은 조회시간이 좋았다.


그 시절 우리 집은 아궁이에 불을 때어서 가마솥에 밥을 해 먹었다. 어머니는 가끔 나에게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을 시키곤 하셨는데 나는 아궁이의 불이 잘 타오르도록 부지깽이를 들 쑤시면서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노래를 하곤 했다.


“낮에 노올다 두우고 온 하아얀 반달은 엄마 곁에 누우워도 새앵각이 나아요. 푸른 달과 희인 구름 두웅실 떠어올라 엄마 곁에 사아알짝 떠다아니이게엤지.”


 밥이 타지 않도록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하는데 학교에서 배웠던 동요 몇 곡을 부르면 대략 시간이 맞았다.


6학년이 되면서 좋아하는 가요도 불렀다. 제일 처음 배운 가요는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이었다.


“안개비가 하얗게 내리던 밤~ 그대 사는 작은 섬으로 나를 이끌던 날부터~ 그대 내겐 단 하나~”


일곱살이 많은 언니가 이 노래를 자주 듣고 부르곤 했는데 나는 이 노래가 쉬우면서도 듣기 좋아서 언니에게 가사를 알려달라고 해서 외웠다. 언니는 중학교 때 합창단원이었다. 언니의 빨간 합창단복과 작은 가마솥 뚜껑같이 모자 중앙에 고리가 달린 모직 베넷 모가 사랑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자식들의 육성회비를 마련해주기도 힘들었던 어머니가 언니에게 합창단복을 사준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


“가로등도 조올고 있는 비 오는 고올목길에 두우 손을 마아주우 자압고 헤어 지이기가 아아쉬워서~”


어머니는 노래를 자주 부르셨다. 언니에게 합창단을 기꺼이 허락한 것은 어머니도 노래에 대한 애착같은 것이 있어서였던것 같다. 어머니는 특히 주현미 노래를 자주 부르셨는데, 나는 가사를 자꾸 틀리게 부르는 엄마가 안타까워서 주현미의 노래 가사를 종이에 큼직하게 받아 적어서 어머니에게 알려드렸고 함께  부르기도 했다. 나는 지금이라면 트로트 노래를 질색 팔색을 하는데 오히려 청소년 시기에는 어머니 덕분에 주현미의 트로트 노래를 자주 듣고 불렀었다.


나는 성인이 되면서,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노래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노래방 문화가 인기였던 시대였음에도 나는 노래방을 거의 가지 않았다. 변변치 않은 밥벌이로 가난했고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나의 청년시절에 나이트나 노래방 등 오락을 즐긴다는 것은 내게 크나큰 사치였다. 그 시절, 어쩌다 회식때 노래방에 가면 노래방 반주에서 나오는 박자를 놓치고 허둥지둥 댔다. 노래를 가수의 목소리를 따라서 불러는 봤어도 반주에 맞춰 불러 본 기억이 없으니 박자에 맞게  노래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나는 노래엔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노래를 즐겨 불렀던 기억이 있음에도 나는 노래 부르는 것에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고 노래와 무관하게 살고 있었다. 또한 두 아들들을 키우며 집에서 하는 내 역할은 잔소리 담당이었고 큰소리를 내는 역할이었다. 말이 없고 무감각한 편인 남편은 내게 말하곤 했었다.


“잔소리는 1절로 족해. 그리고 소리는 왜 질러?”


혹시 내가 교양 없다고 생각하시는 중? 네. 교양이 그렇게 넘치는 스타일도 아닙니다만, 고집스러운 세명의 남자랑들과 24년쯤 살게 된다면 나를 조금은 이해해 줄 수 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잔소리가 1절로 끝날 수 있는 상황이면 소리를 지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이런 전쟁터같은 결혼생활로 남편도 아이들도 심지어 나도 옥타브가 한껏 올라간 내 목소리에 저절로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조차도 내 목소리가 싫어졌다. 그랬던 내가 내 목소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제주여행을 위한 정보를 찾기 위해 제주를 소개하는 유투버들의 브이로그를 보게 되었다. 여행담에 있어 사실적이고 분명한 전달력에는 동영상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길이 얼마나 험한지 얼마나 아름다운 지 멈춰 있는 예쁜 사진 한 컷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이 영상으로는 부연설명 없이도 정확하게 잘 전달되었다. 영상에 목소리까지 담아 설명하니 더욱 보기가 편했고 재미있었다. 브이로그가 개인방송의 대열에 당당히 들어선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한라산 백록담 남벽을 영상 촬영하며 내 목소리도 함께 녹음해 본적이 있다. 한라산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나쁘지 않았다.

그에 이어 오늘 아침 공원의 풍경에도 조용하게 읊조리는 내 목소리를 담아 보았다. 새롭게 들렸다. 아이들에게 내지르는 습관이 밴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톤을 낮춘 잔잔한 음색이 꽤 괜찮아 보였다.  내 목소리에 대해 긍정의 마음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대충하고 고등학교 때 애창곡이었던 이선희의 ‘애상’을 따라 불러 보았다. 녹음도 해보았다. 그때처럼 미성도 아니고 고음도 올라가진 않았지만 나이를 품은 목소리가 따뜻해 보였다. 집에 있던 큰 아들에게 내 노래를 들려주었다.


“아들, 내 노래 어때? 이상해?”

“아뇨. 좋아요.”


남편에게 보내 보았다.


“내 노래 어때? 평소 내 목소리 듣기 싫다며.”

“잔소리 하는 목소리는 별론데 노래하는 목소리는 좋네.”

“진짜야? 그럼 나도 보컬 학원 보내줘.”


어릴 때 부지깽이를 들고 연습하던 내 목소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만약 내 목소리에 대한 나 스스로의 자신감이 있었다면 누가 알겠는가. 남편과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만 내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고 몇 옥타브쯤 시원스럽게 지를 줄 아는 노래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을지.

나는 남편에게 농담처럼 “나도 보컬학원 보내줘”라고 말했지만 그 말속에는 나도 이제라도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싶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마음. 이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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