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도는 힘
삶에도 총량의 법칙이 있다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끼리 농담처럼 했던 말이 있다. 남자 사람에게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는 거라고.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남자 사람이 청소년기에 그 특별하고 특이한 지랄의 병력을 앓고 지나가지 않으면 어른 남자 사람이 되어서 라도 꼭 그 병을 앓게 된다는 것이 ‘지랄 총량의 법칙’이다.
여기서 ‘지랄의 병력’이란 사춘기를 호되게 겪어 엄마 사람을 아주 많이 괴롭게 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래서 여자 사람인 우리들끼리 은밀하게 하는 말로 ‘차라리 사춘기에 그 병을 앓고 지나가는 것이 훨씬 낫더라. 사춘기에 별일 없이 순둥순둥 지나간 남자 사람은 이 총량의 법칙에 따라 성인기에 꼭 앓게 되어 있는데 그때는 병력의 범위가 커져 더 감당하기 힘들수 있다더라…….’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 뭐 그런 이야기다.
사춘기는 보통 중2에 찾아와서 청소년기 시절을 주름잡는 중2병이라고도 한다. 대개 엄마들은 초등학교 시절 유순한 아들들을 보며 설마 ‘내 아들은 중2병과 상관없겠지.’라며 학원으로 뺑뺑이 돌리고 스케줄러 역할을 충실히 하며 나름 성실한 과잉 보호자로 살게 된다. 스카이 대학 입성을 위하여. 그리고 아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람은 꿈을 크게 꾸어야 해.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러나 내 아들 네 아들 할 것 없이 모두 중2병을 앓게 되자, 엄마 사람들은 ‘지랄 총량의 법칙’을 거론하며 ‘그래 차라리 지금 겪는 것이 낫지. 어른 사람이 되어서 저러면 그 꼴을 어떻게 볼까. 남자 사람들에게 사춘기가 늦게 찾아오면 더 큰 사고를 친대……’ 하며 서로를 위로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랄의 병력은 남자 사람에게만 오는 것도 아니었고 그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이 사춘기 병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사춘기를 너무 무난하게 보내서 지랄의 병력이 뒤 늦게 찾아왔다. 뒤 늦게 앓았고 넘어선 그 병력들의 경험으로 터득한 진리가 있다.
삶에도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더라는 것! 내 삶도 행복에 닿아있지 만은 않았다. 불안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행복한가? 그도 꼭 그렇지만 않다.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얻어진 편안함이다. 상황이 더 나아진 것은 없는데 내 마음은 보다 편안 해졌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지.’라는 안도감이 생겼다. 욕심 비우기가 자동으로 되는 중년 사람의 장점 때문이다. 무뎌진 감정 때문이다.
중년 사람의 삶은 젊은 시절 혹독했던 비바람이 따뜻한 온기가 되어 대기를 덮는 시간과 같다. 치열한 전장 뒤에 찾아온 평화와도 같다. 시작하는 사람들의 가난한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정거장이다. 정거장에 서서 인생을 중간 정산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나는 힘들고 불안했던 지나온 내 삶을 중년의 정거장에 서서 바라보았다. 나의 행복을 가로막았던 운명적 삶도 내가 살아온 삶 전부를 놓고 계산해 보니 그렇게 큰 손실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좋았던 일, 나빴던 일, 좋았던 순간, 고통의 시간들을 '퉁' 쳐보면 평점이 그리 낮은 인생 점수는 아니었다. 이만큼 살고 보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삶을 살수록 삶의 점수는 점점 후해 진다. 우리가 끝까지 살아갈 이유이다. 내 인생의 높은 평점을 위해. 우리는 줄기차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지금의 삶이 조금 벅차더라도 오늘을 살아 내일로 나아가 보자. 사춘기의 질풍노도기가 지나 좋은 추억으로 미소 짓게 되듯 자갈길을 지나고 나면 나무 그늘 아래 벤치가 놓인 종착역을 만나게 될것이다. 물질과 마음의 가난에서 벗어난 풍요를 만날 수 있다. 지랄의 병력을 앓는 사춘기가 지나 진짜 어른이 되듯 삶의 파고를 넘어서면 풍요의 삶이 우리를 기다린다. 아픔 뒤에 갖는 성찰, 질주 뒤에 오는 종착지, 이별 뒤에 오는 성숙, 이것들의 정반합이 바로 ‘삶의 총량의 법칙’이다.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며 ‘퉁’ 치는 것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