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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Apr 27. 2023

이기적으로 살기, 매우 권장합니다

이기적으로 살기, 매우 권장합니다


타인과의 관계는 수많은 고민으로 되새김질 했으면서 나와의 관계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나의 태도를 ‘무지’로 일축하고 싶다. 불안한 내 감정을 돌보는 법을 모르고 살았던, 사유하지 않았던 ‘삶의 오류’라고 말하고 싶다. 무지한 나의 삶의 태도는 명백히 평화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오랫동안 그 ‘무지’의 태도로 타인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타인과의 관계는 한번 어그러지면 회복되기 쉽지 않을뿐더러 사회적으로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거나 고립된다. ‘고립’, 나는 그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 고립감을 피하기 위해 나는 나의 모든 에너지를 밖으로 쏟아부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나의 에너지가 외부로 향할수록 나는 더더욱 상처받고 슬펐다.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외부에서 발아하는 행복 모습은 가면 쓴 내얼굴과 같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 안에서 명랑한 행복이나 삶의 충족감을 찾지 않고 외부에서 찾는 습관이 있다. 진짜 행복은 타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나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관계와 능력을 쫓아 가느라 나를 놓치고 있었다. 감정의 평화와 행복을 외부에서만 찾았던 것 같다. 나의 ‘무지’ 덕분에. ‘내 처지는 왜 이럴까. 남편은 아이들은 또 사람들은 왜 나를 이토록 슬프게 할까.’ 등의 나의 불행의 이유를 밖에서 찾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분명 예전과는 내 고통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피로감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아마도 삶의 고통을 겪어오면서 아픔과 슬픔에 대처하는 방식을 터득하게 된 것 같다. 고통은 나에게 철학하는 법을 알게 했고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철학이란 게 별거 있나.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러다보면 일상에서도 수많은 철학과 마주할 수 있다.

나는 미하일 바쿠닌의 ‘파괴의 욕구는 창조의 욕구’라는 말에 매력을 느낀다. ‘파괴는 창조의 시작’, 이는 우리 일상에서도 흔히 대입될 수 있다.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낸다. 내 경우, 내 감정의 파괴가 나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도출해 냈다. 아니러니 하게도 나의 멘탈이 붕괴되었던 때가 바로 나의 해방기였다. ‘아픈 만큼 성숙’이 아니라 ‘아픈 만큼 해방’이었다.

그 해방책은 바로 ‘이기적 삶’이었다. 가족의 밥(집안일)과 나의 자유를 맞바꿨다. 재밌는 일은 내가 집안일에 소홀해지니 집안일에 잼병인 남편이 빈틈을 메꾸고 있더라는 것. 자신의 식사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가끔 아이들 밥도 해주는 남자로 변했다. 남편은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면 집안일에 아주 비협조적인 얄미운 구석이 있지만 나는 나의 ‘이기적 삶’을 기반으로 남편에게 집안일을 하나씩 부여해 나갔다.

남편이 쉬는 날 설거지 담당(이틀 휴일인데 남편은 흔히 놀러 나간다. 그러면 그것도 내 차지이다. 그나마 작년에 싱크대를 남편 허리 높이로 높여서 가능한 일이 되었다.), 분리수거(내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도맡은 첫 번째 남편의 집안일), 자신의 식사 챙기기(오로지 자기 생존을 위한 자기 스타일이라 나는 먹지 못할때가 많음), 자신의 옷 다리기, 딱 이 정도. 그밖에 화장실이나 집안 청소, 침대보 갈기, 빨래, 정리정돈, 집수리, 옷장정리, 아이들 식사 챙기기, 설거지 등은 고스란히 당연하게 내 차지이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를 챙기게 된 남편은 생각보다 내게 큰 도움이 되었으며 그렇게 남는 시간은 나의 삶의 감각을 깨우는 데 사용했다.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당당하게 즐기기도 하며. 

물론 내 뜻은 집안일을 꼭 공평하게 하자는 말은 아니다. 나는 집안일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주도적으로 하는 반면 남편은 겨우 생존형 집안일에 그칠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풀어놓는 생활 불편사항을 기분 좋게 받아들여 능동적으로 고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부부 싸움으로 변질시켜 버리는 것이다. 다만 집안일에 대해 책임감 없는 그의 태도, 나는 그것이 몹시 못마땅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볼 때 21세기의 엄마들의 삶은 남성들에 비하면 ‘숭고함’에 가까울 지경이다. 요즘 신세대 부부들은 살림을 똑 같이 나눠서 한다고도 하는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까 싶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워킹맘의 다중적인 고충(육아, 가사, 사회)으로 원성이 자자하니 말이다. 우리 여성들이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도 벅찬 마당에 남편의 양육자까지 되어야 하겠는가?

하지만 의외로 내 남편의 생존형 변화는 매우 발전적이었다. 한 번은 파김치가 먹고 싶었던지 시장에서 파를 사서 다 까고 다 씻어 놓기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김치를 담지 않을 수 없도록 아주 세심한 꾀를 발휘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음에도 파김치를 기꺼이 담가 주었다. 남편의 노력에 대한 포상은 정확히 해주는 걸로. 아! 김장 담그기도 몇 년 전부터 남편의 주도하에 하고 있다.(처음엔 나 혼자 하다가 힘듦을 알고 같이 도와주다가 이제는 나보다 더 잘 담그심)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술 담그기, 산나물 채취하여 말리기, 물 끓이기(요로결석이 걸린 이후로 물을 아주 잘 챙겨 드심) 등 자신을 위한 집안일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나열해 보니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내 남편 정도면 후한 점수를 줄 것도 같은 민망한 감정이 밀려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곧 나의 ‘이기적 삶’이 만든 결과라는 것이다. 나의 까칠한 투쟁, 끊임없는 잔소리 덕분이다. 그래서 나마 지금의 내가 남편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런 남편에게 나는 가끔 참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을 하곤 하는데 남편의 이 이기심에 비하면 나의 ‘이기적 삶’의 투쟁은 아주 애교스러운 일이다. 답답한 마음에 간혹 남편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다른 여성들에게 토로하면 아직까지도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인식하거나 매우 관대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하물며 나를 한심한 듯 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여성을 마주할 때면 내가 아주 이해심 없는 여성인가 생각하다가도 동시에 답답함이 느껴진다. 여성의 사회생활이(특히 중년 여성의 재 취업률이 매우 높다) 활발해진 시대에 여성에게 가사 독박의 고충이 여전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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