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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May 12. 2023

돌봄 민주주의, 새로운 이데아를 상상하며


1990년 피셔와 트론토는 돌봄의 폭넓은 정의를 제시했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가능한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세상’을 바로잡고 지속시키고 유지시키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종(種)의 활동으로 돌봄을 간주하여야 한다. 이 세계는 우리의 몸, 자아 그리고 환경을 포함하며 복합적이며 생명 유지의 그물망으로 엮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라고 제안했다. <조안 C.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 67p>


그렇다. 국가와 인류는 사람을 돌보기 위해 존재한다. 정치, 경제, 안보 모두 사람을 돌보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다. 그렇지 아니한가? 현시대에 이르는 놀라운 과학의 발전까지 인류는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오늘의 인류는 점점 불평등이 만연하다. 그 불평등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 이 의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가 고민하던 문제이다. 그 문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다양한 학설을 유추하고 그 원인을 분석해 왔다. 인간들이 왜 이지경인지, 인간 본질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탐구도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지구는 전쟁과 다툼을 쉬지 않는다. 이 아이러니란. 아니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인간의 욕망이다. 분명 우리는 인류의 불평등이 어디서부터 어긋나고 시작되었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어떻게 하면 그 불평등이 해소될 것인지 방향성도 알고 있다. ‘인간은 욕망을 줄여야 한다고. 이대로 멈추지 못한다면 인류 멸망에 이를지 모른다고.’


이처럼 조안 C. 트론토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자유, 페미니즘,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과잉 생산과 성장주의,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의 병폐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전 주에 읽었던 아나키즘도 오늘의 이 책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 생각된다. 어떻게 하면 인류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 평등한 세상을 선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 책도 뭐 이런 메커니즘이 아닌지. 그러나 나는 인간의 욕망으로 이 방만하게 커져버린 사회 문제에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다. 너무나 많이 얽히고 쌓인 문제들에 대해 어디서부터 수정을 하고 변화를 시켜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줄일 수 있는가.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돌봄 민주주의’는 또 하나의 이상적인 이데아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는 나에게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현 인류 생태계의 허를 바로 찔렀다고 생각했다. 나는 트론토의 주장이 어떤 사회학적 가설보다 단순하면서도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돌봄은 어느 한 민족, 한 계층, 한 성역, 한 무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기심이 팽배한 이 사회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다른 무엇보다 쉬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관계 속에 삶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 명백하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돌보는 관계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우리 사회의 폐단이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상상을 하며….


세상 모든 것 또는 국가는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고 수단이다. 정작 우리는 그 본질을 놓치고 살고 있다. 언제나, 늘, 항상, 평등하고 자유가 허락된 민주사회를 염원하는 우리들, 이러한 사회는 인간 모두가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는 사회이다. 모두가 평등한 인권을 누리는 인간존엄의 사회,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것 말고는 나로서는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 의미로 함께 돌봄은 민주주의를 가장 잘 설명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함께 돌보는 세상, 이를 위해선 우리에게는 통합적 사고가 필요하다. 가령, 각각의 소수자들이 각각의 이유로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서로의 갈등 유발의 현상을 많이 봐왔을 것이다. 장애인연대의 지하철 시위, 화물연대의 파업, 윤석열의 화끈한 결단을 두고 한쪽에서는 죽일 놈, 한쪽에서는 하얀 이를 들어내지 않고 웃음을 삼키고 있다. 사회문제는 한쪽에 힘을 실어주면 다른 한쪽이 기울게 된다. 돌봄 노동도 그러한 형상이다. 돌봄 수혜자의 입장과 돌봄 노동자의 입장은 사장과 직원의 입장 차이만큼이나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수자 각각의 인권이 아닌 모두의 인권을 거시적 관점으로 생각해야 한다. 각자의 주장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돌봄의 확대와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나는 함께 돌봄이 정치적 의제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트론토의 주장에 깊은 감동과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서로를 돌보는 마음이 기초가 된다면….

이 정신을 트론토의 주장처럼 정치적 의제의 중심으로 끌어올 수만 있다면….

그런 의미로 ‘함께 돌봄’은 민주주의를 가장 잘 설명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우리가 돌봄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면, 역사도 돌봄 쪽으로 구부러지지 않을까?

‘함께 돌봄’을 민주주의라는 이상 실현의 덕목으로 삼고 우리가 정치적 합의를 한다면,

세상에 있는 각각의 불평등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지 않을까?


노동,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미시적 관점보다 인권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큰 그림이 보이듯, 평등한 사회를 위해선 거시적 관점의 시선이 필요하다. 모두가 함께 돌봄의 영역을 넓혀간다면 돌봄은 물론 노동도 페니미즘도 교육도 해결될 일이다. 트론토는 이 책에서 이러한 것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돌봄 민주주의는 거시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함께 돌보는 세상이다.


특히 트론토는 함께 돌봄의 가장 근원적 문제는 돌봄을 공적인 것과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주로 남성들이 맡고 있는 돌봄의 분야(경찰, 군인 등)는 공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어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반면 여성이 주로 맡는 돌봄은 사적영역으로 분리되어 인정받지 못한다는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돌봄의 문제가 젠더 갈등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불평등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더 나아가 트론트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남성)이 돌봄의 세계에서 무임승차권의 권리를 누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나는 정말 많은 공감을 했다. 무임승차권을 가진 그들은 우리 사회의 어떤 성별이며 어떤 인종,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가? 여성이, 유색인종이, 하급노동계층이 전담하고 있는 이 돌봄 노동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에서는 트론토는 돌봄의 영역이 왜 사적영역으로 밀려나 여성과 노동 계층의 약자가 떠맡고 있는지, 남성들과 자본의 상위계층이 어떻게 돌봄의 무임승차권을 가지게 되었는지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엔 성장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실패한 성장주의를 이제 그만 파괴하고 ‘함께 돌봄’의 의제로 새로운 이데아를 창조하는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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