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아이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느껴지세요. 좋은 선생님 같아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많이 민망하고 조심스러워진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로 되돌려 주고는 한다.
“당연한 일인걸요. 이 일은 아이에게 좋은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직업이에요. 또 그래야 하고요.”
나는 J를 돌보며 나를 교화한다. 말의 톤을 낮고 부드럽게 하려 노력하고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도록 노력한다. 아이가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애를 쓴다. 주변 환경이나 여건에 쉽게 반응하는 편인 나를 최대한 무뎌지게 하려 노력한다. 혹시나 나쁜 컨디션으로 아이를 다그치지 않을까 싶어 평소 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과다한 체력 소비를 피한다. 컨디션 조절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이렇게 J를 돌보기 위해 내가 나 자신을 조절하는 사이에 내가 전보다 더 여유롭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도 같다. J를 돌보는 행위가 곧 나를 돌보는 일이 된 것이다.
간혹 주변사람들은 나를 아이의 엄마로 착각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내가 표출하는 행동이나 마음들은 딱 돌봄 노동자의 그 이상의 감정도 그 이하의 감정도 아니다. 장애인활동지원사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직업 관이며 마인드일 뿐이다.
처음 내가 이 일에 뛰어들었을 때 무조건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는 민망한 나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연인들의 사랑이 변하듯 나 또한 내 마음이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 직업을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다.
1년 4개월, Y(11세)를 돌볼 때 일이다. 1년 정도는 잘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점점 마음도 몸도 지쳐갔다. 처음처럼 그 사랑스럽고 애틋한 마음이 지속되지 않았다. 많이 힘든 아이였다. 별난 일이 많았다. 무조건 예뻐해서 되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 아이에게 친절한 돌봄은 만만한 대상이 되고 엄한 돌봄은 골려주고 싶은 상대가 되었다. Y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골려줄까 생각하고 사는 아이 같았다. 길바닥에 들어 눕는 것은 기본이고, 그릇에 담긴 액체는 모두 쏟아야 하고(하물며 공원을 걷다 다른 사람이 들고 다니는 음료컵을 툭 쳐서 쏟아야 직성이 풀리는) 고의로 오줌을 싸서 하루에 옷을 10번도 갈아입힌 적이 있다. 내 차(스쿨버스, 소파, 치료실 가리지 않는다)에 오줌을 싸는 것은 다반사고 poopoo를 해서 손으로 뭉개는…poopoo 냄새로 감각을 추구하는…. 아이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클수록 깃털 같이 가벼운 내 마음이 미움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았다. 돌보는 아이를 두고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긴 병에 장사 없다는 옛 말이 어떤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Y를 돌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체력의 한계를 느꼈고 마음의 한계를 느꼈다. 그리고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중증 발달장애인을 돌본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핑계 같은 말이지만, 이런 상황에 인간의 마음이 변함없을 것이라 기대한다는 것은 성인(聖人)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알다시피 인간의 마음은 아니 내 마음은 얼마나 간사하고 이기적이며 요동을 치는 속성을 가졌는가.
그리고 6개월의 휴식을 거치니 다시 이 일을 할 에너지가 생겨서 지금의 J를 만났다.(센터에서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주셔서 다시 일할 용기를 냈다) 그런데 또 사람이 참 적응을 잘하는 동물인 것이, 첫 경험을 너무도 어려운 Y를 돌봤더니 J를 돌보는 것은 그리 어렵게 생각되지 않더라는... 미움을 견제하고 주는 사랑을 사랑으로 받는 J가 너무 고마웠다.
그리하여 이일을 한지 어느덧 4년 차가 되었다. 이제 나는 환자를 돌보는 일에 내 마음이 과잉친절로 비추지 않도록 조심한다. 또한 반대로 아이에게 짜증을 느낄 때 의식적으로 사랑을 품는다. 그래서 중용의 마음을, 마음의 균형을 지키려 노력한다. 한동안은 정말이지 J가 너무 귀여워서 애정표현이 넘쳤다. 이 애정표현이 J의 엄마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내게 다시 돌아왔다. J를 예뻐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 뒤로 J를 향한 지나친 예정표현을 조심했다. 나는 내 마음의 한계를 알기에 주변의 그런 평가들이 몹시 부끄럽고 난처했다.
그동안 활동해 본 경험으로 나에게는 이 직업에 대한 직업관 같은 것이 나름 생겼다. 돌봄 노동은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 철저한 직업 관이나 직업의식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더 안정감 있고 좋은 돌봄이 될 수 있다는 것.
돌봄 노동은 절대 정이나 사랑 같은 얕은 감정을 앞세워할 일이 아니다. 환자를 끝까지 책임지는 부모가 될 수도 없고 때가 되면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간혹 사회봉사의 개념으로 이 일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이 말이 너무나 불편하다. 이렇게 장기간, 장시간동안 봉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앞서 말했듯 그 사람은 정말 성스러운 사람인 것이다. 또한 어느 보호자들은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케어해 주기를 기대하는데 이 또한 솔직하게 불가능한 일이다. 돌봄 노동자는 가족도 아니고 부모도 될 수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해서 환자를 돌보는 직업인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시어머니에게 며느리가 딸이 될 수 없고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친정 엄마가 될 수 없다.
나는 돌봄 또한 다른 직업처럼 능력으로 승부하고 직업의 규약이나 규정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이 올바르고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다만 돌봄 노동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선한 마음과 성실함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돌봄 노동자는 되도록 선한 마음가짐과 최상의 컨디션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로 인해 환자가 상처받지 않도록 나 자신의 몸과 정신을 돌보는 일에 게으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돌봄은 사사로운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직업의식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하는 단단하고 한결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돌봄 현장에서 만난 장애인 딸을 둔(장애인활동지원사로 활동을 하는) 분의 말이 생각난다. 그녀는 자기 자녀의 케어를 위해 돌봄 선생님의 면접을 볼 때, 이 일을 봉사의 개념으로 말하는 사람을 가장 경계한다고 했다. 솔직히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와 케미가 잘 맞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이 직업에 대해 오해와 편견에 사로 잡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일은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하는 일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이 하는 일도 아니다. 모든 직업이 그렇듯 자기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직업이다. 다른 직업처럼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능력을 발휘하는 직업이다. 다만 사람을 돌보는 일이니 만큼 자기 마음을 잘 알아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이상 증후를 느낄 때 바로 멈춰 서거나 재정비의 시간(휴식의 시간)을 갖는 자기 돌봄의 지혜가 이 일에 대한 최고의 전문성이다. 이에 대해 아쉬운 부분은 우리 사회의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직업군은 대체적으로 자신을 돌볼 시간이나 휴식이 적다는 사실이다. 저임금에 열악한 근무조건이 안타까운 사건사고를 양산해 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