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 남편과 나는 철원 한탄강에 다녀왔다. 수년 전 가족들과 이곳에서 래프팅 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그때는 여름철 우기, 강물이 불어 있어 한탄강 물줄기의 강렬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한탄강의 풍요로운 물줄기를 바라보는데 그치지 않고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바위에 부딪히고 협곡을 돌아 급류에 휩쓸리기도 했던, 근육질 남자의 힘줄 같았던 그 한탄강이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한탄강 물위로 길을 내어 강물 한가운데를 걸을 수 있도록 했다. 강을 가로지를 수 있는 높은 은하수 다리도 만들었다. 한탄강의 풍경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보트를 타지 않고도 강물 위에 설수 있게 되었다. 하늘 위에서 한탄강을 경이롭게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고 강변을 걸으며 용암이 흘렀던, 이제는 단단해져 더는 뜨겁지 않을 상흔을 한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우기의 혈기가 한풀 꺾인 건기의 한탄강은 수위가 낮아졌다. 아픈 아이를 안은 어머니처럼 초조해 보였다. 강물 위의 물윗길이 마치 핏기를 잃은 아이의 혈관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아슬아슬, 미지의 세계에 닿고 싶은 사람들. 나는 파리하게 떨리는 아이의 혈관을 밟고 지나가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사람들은 산중턱을 마치 과일처럼 돌려 깎아 둘레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걷고 건강을 챙기고 풍경을 가슴에 담아 갔다. 이제는 강물위로 인위적인 길을 내어 강물 위를 걷는다. 강물을 밟고 선다. 이 새로운 창작품에 감탄을 하고 더 가까이 취할 수 있음에 기뻐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안타까웠다. 사람들은 저렇게 강물을 가로질러 가까이 닿아야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집착의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물윗길이 시작되는 매표소로 한참을 걸어갔다. 주차장에서 보았던 많은 인파들이 입장권 구입을 위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는 이내 물윗길 걷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긴 줄을 기다리며 물위길을 걷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매표를 포기하고 주차장으로 되돌아가는 강둑 위로 걸으면서 쪼르르 줄을 지어 아이의 파리한 혈관 위를 걷는 행렬을 바라 보았다. 강이 가여웠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강변 모퉁이를 돌아섰다. 시퍼런 한탄강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황금색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것 같은 강을 외면하고 들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가 갈 곳은 바로 이 길인가?” 황금색 들판 쪽으로 저절로 발길이 움직였다. 논이 노랗게 익어 있었다. 가을인가. 착각이 들었다. 논을 아직도 갈아엎지 않아서 지난 가을에 베어낸 벼의 밑 둥이 여전히 노란 빛을 품고 있었다. 생기를 다한 벼가 뿌리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고 있었다.
많은 생명들이 지나간 들을 포근하게 안고 있는 논둑 위의 풀들도 계절을 입어 노랗게 익어있었다. 쓸쓸해 보였다. 파릇했을 봄, 이파리가 무성했을 여름, 달큼하게 취했을 가을, 하얗게 시린 밤을 견뎠을 겨울이 이 들판위로 내렸을 것이다. 모든 생명들은 계절에 취해 세월을 건너왔을 것이다.
들에는 다시 봄이 내리고 있었다. 한탄강의 변화된 모습과는 상관없다는 듯 강변에 살아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어제를 모두 견뎌내고 어린 새싹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한탄강이 호기롭게 변해가고 있을 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들의 풍경이 외로워 보였다. 나는 들의 수고를 마음에 담는다.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 찰칵찰칵 한탄강를 둘러 안고 있는 들의 외로움을 한데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