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
짐멜에 따르면 대도시라는 삶의 조건은 우리의 내면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상호 무관심'과 '속내 감추기'로 표현되는 개인들의 자유이다. 시골 사람들을 규정하는 것이 '인격적 만남'이라면, 도시인들에게는 '비인격성'이 대부분의 만남을 규정하는 계기이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_소통은 가능한가)
강신주에 따르면, 여기서 '인격성'이란 상점 주인이 나를 알고 있기에 외상을 줄 수 있는 조건이라고 해요. 그러나 도시에서는 불확실한 신상 정보로 돈과 상품만이 오가는 '비인격적 만남'이 되며, 만약 도시인이 그 많은 사람들과 일일이 인격적 만남을 해야 한다면 금방 신경과민에 시달릴 것이라고 말해요.
정말 타인이 나를 일일이 아는 척하는 것은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에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한번은 제가 상대를 신경써준다는 이유로 눈치없이 다가갔다가 짤린 사건도 있었어요.^^ 이처럼 아는 척도 한두 번이지 과한 친절로 자신의 자유를 침범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도시인의 자유로운 삶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지요.
제가 이런 도시인이 되어 있는 건 모두 경험에서 얻은 포지션이에요. 어릴 때의 저는 외로운 사람이라서 먼저 친구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지요. '왜 나만 좋아하는 것 같지? 왜 항상 내가 먼저 연락하게 되지?' 자존심도 많이 상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내 나름대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거나 거리 두기였어요. 그리고 '혼자 놀기'였어요. 이렇게 관계에 있어 냉담한 태도를 가지기 시작했지요.
재밌는 것은 홀로서기를 하자 자신감이 생겼고 더 좋은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는 거에요. 홀로서기의 위력을 알게 된겁니다. 문득 서정윤의 '홀로서기'라는 시가 생각나네요.
<서정윤의 홀로서기 중에서>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이번에는'하며 이겨 보아도
결국 인간에게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저는 이 태도를 사람들에게 배운 거예요. 알고 보니 사람들은 이미 짐멜이 말한 것처럼 '상호 무관심'과 '속내 감추기'를 관계의 미덕으로 알고 살고 있었던 거예요. 어쩌면 나를 감추고 적당한 거리에서 예의를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도시인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이었던 거죠.
저는 홀로서기를 통해 '나를 지키는 법'을 찾았고 결국 시가 전해주는 것처럼 '인간에게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리고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안 같은 것이 찾아오더군요.
텅 빈 마음이 들면 김칫국에 밥이나 말아먹고 속을 채우라던 한 친구의 말도 생각나네요. 그렇지요. 내 속은 내가 채워야 했던 겁니다. 짐멜에 따르면, 이러한 냉담한 거리 두기는 도시인이 자기를 보호하는 방어전략 같은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저를 방어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어요.
그러나 이런 냉담한 태도는 도시인을 원치 않는 고독 속에 빠지게 한다고 해요. 냉담한 태도를 지속하다 보면, 혹은 상호 무관심한 자유를 향유하다 보면 친밀한 소통을 할 사람이 없게 되지요. 그래서 강신주에 따르면, 도시인들의 사랑은 편집증적이라고 하더군요. 오래간만에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인격적 관계를 만났을 때 뚜껑 열린 샴페인 병처럼 감정이 폭발해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는 그만큼 도시에 살면서도 '인격적 만남'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과연 상대방도 나처럼 속내를 쏟아 놓을 수 있을까?
라고 강신주는 묻고 있어요. 다른 표현으로 '우리의 소통은 가능한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고요. 저도 많이 해보았던 경험이지요. 내 속내를 뚜껑 열린 샴페인처럼 털어놓다 보면 상대방은 금세 뒷걸음치게 된답니다. 외롭다고 징징거려보았자 사람들은 속내를 비친 나를 가볍게 보기 일쑤였죠.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저는 자연스럽게 '코키토-의심하는 주체(데카르트)'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 같아요.
'사람을 믿지 말자. 이해득실 관계가 다인 우리의 사회적 관계에서는 진정한 친구란 없다.' 이런 마음으로 살고 있는 도시인이 바로 저라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나)의 삶은 나라는 주체적 삶보다 타자에게 반응하며 살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요.
참 씁쓸하지만 제게는 이것이 진실된 사회 관계학이고 나를 지키는 삶의 방패예요. 더 이상 사람들로 하여금 상처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이곳 재활병원에서는 짐멜이 말하는 '인격적 만남'이 만들어져요. 좁은 공간에서 매일 마주치다 보면 냉담적 태도의 나의 결심은 무용지물이 될 때가 많지요. 후줄근한 제 패션을 일일이 지적하고 참견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오늘은 결혼식 복장이네? 안 추워요? 는 다반사고 코트를 들춰보는, 포대를 입었네요. 대학생 같네요. 난 이런 옷은 못 입어요. 출근 준비하며 옷을 입을 때마다 그분이 오늘을 무슨 말을 할까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이었어요.) 마주칠 때마다 다정과 인사를 빙자한 참견질(오늘은 왜 늦었어요? 매일 이 시간에 와요? 어제는 왜 안 왔어요? 어디 안 좋으세요?)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눈치 없는 두 분이 계셔서 참 불편한 마음이 들어요. 제 마음이 말을 하지요. 얼른 이들에게서 도망쳐~~~. 도시인에게 감당하기 힘든 불편한 '인격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우연 씨와 저의 만남은 좋은 '인격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서로 속내를 털어놓는 그런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었죠. 사고방식이나 인생 추구미가 비슷하기 때문 일거예요. 솔직해서 서로 속내를 감추려는 위선이 없어도 된다는 점이 좋아요. 애써 교양 있는 척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의 입장과 마음 이해는 기본이에요. 그래서 우연 씨와 말을 하다 보면 속이 뻥 뚫려요. 제가 불편했던 심리를 정확히 이해하거든요.
"왜 언니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요?"
"우연 씨가 나를 이해해 주고 내 편을 들어주니 너무 속이 시원해요."
"언니,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기쁨을 주는 타자와 연대하라'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이해되는 순간이었어요. 스피노자에게 삶의 주체란 자신의 삶을 유쾌하고 즐겁게 증진시키려는 의지, 즉 코나투스를 가진 주체라고 해요. 코나투스는 타자와 마주치면 증가하거나 감소될 수 있는 역동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코나투스를 증진시키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제가 최근 들어 느끼는 점은 맞지 않는 사람과 애써 맞추려는데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에요. 물론 나 자신을 성찰하고 태도를 교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결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도시인으로 살아가는 최선의 방식은 나다운 모습을 부정하지 않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어요. 그가 곧, 내게 기쁨을 주는 타자가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