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의 장편 소설 <밤새들의 도시>는 우연 씨가 제게 빌려 준 첫 소설책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연 씨와 저를 이어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때마침 추석 연휴여서 최대한 열심히 읽었어요. 저는 주 1회 독서 모임을 하고 있어서 독서 모임 추천 책들을 소화하기도 힘든 상황이에요. 그래서 우연 씨와 소설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해서 무척 아쉽답니다. 그러니 우연 씨와의 인연이 된 이 첫 책을 기록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지요. 우연 씨가 <밤새들의 도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톡을 보내왔었지요.
"언니 전 이 책 읽으면서 남성 여성 구분 없이 그로 표현해 놓아서 읽기가 조금 불편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젠더의식이 진보적이라 그런 거였군요 이제야 알았어요! 언니글을 보면서 이 책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제 견해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 씨가 공감해 주어서 기분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요. 아래는 우연 씨와 나누었던 <밤새들의 도시> 서평입니다. 꽤 열심히 썼네요.
밤새들의 도시
499.
삶의 모든 아름다움과 비극은
'어떻게 될 수 있었는지?'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의
간극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간극은 대부분 아름답다.
<밤새들의 도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 전쟁까지의 재일교포의 디아스포라 적 삶을 그린 <작은 땅의 야수들>의 저자, 1987년생 재미 교포 김주혜 작가의 신작입니다. 작가의 책을 두권 읽은 것이 전부지만 저는 이번 책이 더 좋았습니다. 다만 이 책의 제목이 왜 <밤새들의 도시>여야 했는지 책 내용과의 연결성이 다소 부족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발레리나 나타샤가 발레리나로 성공하기까지의 시련과 사랑과 삶에 밤새라는 소재를 무리하게 얹은 느낌이랄까요?
소설은 발레 공연을 무대에 올리듯 '서막-1막-2막-3막-코다-커튼콜'로 구성되었는데요, 1막에서 검은 새에 대한 악몽과 비행을 시작한 후 한 번도 땅에 발을 딛지 않은 앨버트로스의 종착지가 결국엔 자신이 태어났고 출발했던 서식지라는 복선을 깔아놓아 제목에 타당성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 복선은 소설의 말미에서 제목으로서의 강한 의미를 확인하게 됩니다.
나타샤가 어릴 때 살았던 엄마의 집을 찾았을 때, 어릴 때 인상 깊게 보았던, 가끔 나타샤의 꿈에 등장했던 까마귀 떼를 다시 보게 되지요. 까마귀가 매일 매에게 죽음을 당하면서도 서식지를 옮기지 않는 이유는 죽음의 두려움보다 보금자리에 대한 본능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라고. 지치고 상처 입은 나타샤가 다시 자기 고향에 본능처럼 찾아온 것처럼요. 고향은 언제나 엄마의 품처럼 따뜻한 곳이라는 희망을 기대하는 책이랄까요? 정말 이 소설에서처럼 친구도 이웃도 나를 반겨줄 고향이 있다면 참 든든할 것 같습니다. 때마침 지금은 각자의 서식지로 돌아가는 추석연휴네요.
64. 동물계에서 가장 사회적인 생물은 바로 새다. 같은 종과 일절 교류 없이 밤낮으로 홀로 대양 위를 날며 최대 수년간 땅에 발 한 번 디디지 않는 앨버트로스조차 결국엔 대대로 이어져 온 서식지로 자신이 태어난 바로 그 장소로 돌아간다.
이처럼 김주혜 작가는 제2세대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즉 자기 뿌리에 대한 갈증을 내려놓지 못했던 것일까요? 이런 관점으로 보면 작가가 의도한 이 소설에 대한 주제의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앨버트로스는 나타샤입니다. 앨버트로스는 성공을 위해 무대 위에서 더 높이 더 오래 날아야 했던 발레리나의 삶을 대변합니다. 쉼 없이 항해하는 앨버트로스처럼 지치고 꺾인 날개를 쉴 곳은 결국엔 자신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말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작가 자신이 태어난 곳,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느껴지는 것 같아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소설에서는 한국인 발레리노 태형이 뜬금없이 단역배우처럼 등장하게 되는데요. 태형은 이 드라마에서 아주 잠시 등장했다가 저 문장을 끝으로 사라지게 되지요. 반려 보아뱀이란 표현 말고는 어떤 부연 설명도 없이 말입니다. 작가는 왜 태형이란 인물을 이런 식으로 등장시켰다가 사라지게 했을까요? 만약 한국인 혐오를 고발하고 싶었다면 좀 더 자세하고 진지한 작가의 인식이 첨언되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요? 현시대의 케데헌이나 한류가 전 세계를 흔드는 시점에 말이죠.
388. 글쎄, '폐렴'이래. 선생님은 태형이 흔한 호흡기 질환에 거린 게 아니라 반려 보아뱀이나 발 페티시 같이 좀 괴상하고 수치스러운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듯 마지막 말을 유별나게 강조했다.
지금은 한국의 민족성(문화, 김밥, 떡볶이, 김치, 라면과 같은 먹거리 등)이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자랑스러운 시대입니다. 샤사가 급작스럽게 사고를 쳤던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략(우크라이나) 옹호발언에 관해 자세하게 다뤘듯 부적절한 한혐 시선에 대해서도 한 단락이라도 할애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약 그랬더라면 묵직한 제목에 대해선 한층 가깝고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요?
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이점이라면 여성과 남성의 인칭 표현을 모두 '그'로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젠더의식을 추측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저도 언제가 글을 쓸 때 '그녀'라는 인칭 표현을 굳이 써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여성의 호칭을 '그'로 시도했던 적이 있지요. 성소수자 드미트리를 재능 있고 능력 있는 가장 핵심 인물로 등장시킨 부분도 작가가 젠더 의식에 있어서도 얼마나 관대하고 진보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처럼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작가가 왜 인종 문제에 대해선, 특히 한국인 발레리노를 이렇게 짧게 흐렸는지 더욱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작가는 9살 때 한국을 떠나야 했다지요. 한국에서의 어릴 때 기억이 생생할 것 같습니다. 작가가 타국에서 살면서 느꼈던 혼란이 짐작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제가 읽은 작가의 두 권의 책은 모두 뿌리에 관한 고민이 대서사를 관통하고 있네요. 이것은 제가 김주혜 작가 소설에게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를 결벽증처럼 덧입히는 이유입니다.
저는 이 소설이 귀소본능 내지는 정체성이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에서 벗어나 가난한 발레리나 소녀의 삶과 사랑을 조금은 가볍게 그려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더욱 소프트하고 아름다운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요? 가진 것 없고 백그라운드 없는 한 발레리나의 삶과 러브 스토리만으로도 아주 흥미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요?
제가 이 소설을 흡입력 있게 읽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발레인들의 삶과 얽힌 사랑이야기가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했답니다. 소설 속 나타샤는 결국 삶의 진실을 깨닫고 자신의 삶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어 말을 하지요.
"삶의 모든 아름다움과 비극은 '어떻게 될 수 있었는지?'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의 간극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내가 꼭 말하고 싶은 건, 그 간극은 대부분이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거예요. 나타샤의 삶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이 사실. 그 어떤 의미를 무겁게 가중시키지 않아도 말이죠.
이 아름다움에 더해 이 소설은 구성이 참으로 탄탄합니다. 서막에서 툭 던진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소설의 구성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사건의 비밀을 하나씩 벗겨내는 것이 마치 추리 소설을 보는 것처럼 궁금증을 자아내고 짜릿합니다. 발레를 시작하게 된 어린 시절부터 발레리나로 성공하게 된 과정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지요. 그렇게 우리는 나타샤의 기억을 궁금증으로 가속을 밟아 쫓다 보면 삶과 사랑에 대한, 혹은 예술에 대한 보편적 진리 같은 것을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드미트리와 샤샤의 반전의 전개는 이 소설의 긴장감의 열쇠이기도 하지요.
26. 진정한 예술가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그의 춤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40. 그렇게 나는 이 세상에 불확실성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누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누가 곁에 남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홀로 남겨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먼저 떠나는 것이다.
115. 포기하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심지어 즐겁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구에게 그 어떤 것도 인정받을 필요가 없으며, 내가 굳이 무엇이 될 필요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사람들을 예전에는 무시했는데 이제는 평범한 일상에서 단순한 만족을 찾는 이들이 오히려 성숙하고 지혜로워 보인다.
130.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며 태연히 할 일에만 집중할 것, 칭찬에 우쭐하지도, 모욕에 무너지지도 말 것.
148. 모든 것은 입밖에 내지 않을 때 더욱 강해진다. 두려움도, 슬픔도, 욕망도, 꿈도.
495. 너를 사랑하면서 상처를 줬어. 정말 미안해.
511. 예술이 배고픈 자를 먹이거나 무고한 자를 보호하거나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집에 가는 길에, 스튜디오에서, 또는 무대에서 나를 감동시키는 무언가를 볼 때면, 진실과 아름다움이 만나는 지점이 어딘가 있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다. 그 지점에 영영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녁 공기 속에서 그곳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그러면 충분하다.
515.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건 아주 강렬한 본능이지. 죽음의 두려움보다 더 강렬한.
518. 알리스 볼라트 프로프리스 Alis Volat Propriis.(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르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소설의 가장 결정적인 매력은 발레라는 소재입니다. 발레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한 발레리나의 삶과 사랑..... 탄탄한 구성과 흥미로운 소재, 여기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드라마 영상을 상상했습니다. 너무도 아름다운 로맨틱한 드라마. 그러나 드라마로 제작을 한다면 제목은 다시 지어야 될 것 같습니다. ‘라 바야데르’?, ‘지젤’?, '발레리나 나타샤의 꿈' or '프리마 발레리나의 사랑'?
발레의 용어가 생소했지만 독서에 있어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스킵해도 소설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라 바야데르>, <지젤> 등 몇 개의 발레 공연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독서의 감동을 이어 발레 공연을 보니 참 좋더군요. 발레리나가의 최고 단계가 <지젤> 역이라는 사실도, <라 바야데르>의 아름다움도 알게 되어 발레라는 예술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독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