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은 초라한 모든 것들을 덮을 수 있다. 아주 새것처럼. 그러나 간밤에 내린 눈은 탐스러운 함박눈이 아니었다. 폐허의 본색을 겨우 감출 수 있을 정도의 옅은 싸리눈이었다. 너무 얇고 옅어서 건물의 초라함을 다 감출 수 없었다. 싸리눈은 밤사이에 초췌한 건물의 맨얼굴을 감추려 애를 썼지만 성글고 어색한 미소만 남겼다.
서울 변두리였다. 1층 중앙에 정체모를 낡은 공업사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그 초라함이 더 했다. 나는 마당 끝에 서서 공업사가 섞여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았다.
건물은 연필로 스윽스윽 스케치를 해 놓은 것처럼 무채색 코트를 두르고 있었다. 목조 건물 질감의 각을 세운 듯 반듯했고 견고해 보였다.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하늘을 떠다니는 움직이는 하울의 성처럼 보였다.
공업사 위쪽으로 촘촘하게 모여 있는 작은 집들이 바람에 휘감겨 삐뚤 빼뚤 비틀려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주상복합형의 건물의 형태로 꼭 가난한 고시촌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 같다.
공업사 바로 옆으로는 처마 끝에 어닝이 달린 살림집도 딸려 있다. 그리고 건물 한쪽으로 초라한 낡은 자동차들이 흰 눈이 솔솔 뿌려진 채 얼어붙어 있었다. 이 1층 공업사와 살림집이 바로 앞으로 우리가 살 집이라고 남편이 말했다. 찬바람만 휘도는 쓸데없이 널따란 마당엔 길쭉한 벤치가 버려진 듯 굴러 있었다. 문득, 저 벤치를 요만치 세우고 테이블을 놓으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한껏 부푼 가능성을 보았던것 같다. 이곳에서 내가 즐거울 수 있겠다는 희망. 이곳은 이래보여도 서울이고 재개발 가능성이 높은 곳이 아닌가? 미래가 있는 땅인것이다. 그리고, 마당이 있었다.
나는 마당이 있는 집을 원하지 않았던가. 시골 허름한 집을 내 맘대로 고쳐 사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나는 그 바람을 비로소 이루게 된 것이다. 마당에 꽃도 심고 나무도 심어야지. 제일 먼저 매실나무, 돌배나무, 다래나무, 머루나무를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로 테이블과 벤치를 놓을 것이다. 그 벤치에 앉아, 날이 좋으면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책을 읽을 것이고 오늘처럼 눈이 나리는 날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며 마실 것이다. 돌배나무가 듬직하게 자라나고 다래나무는 돌배나무를 감아 안고 그늘을 만들어 주겠지. 봄에는 하얀 매화꽃과 배꽃에 취해 있을 테고 여름엔 이 열매들을 받아 술을 담그겠지.
이런 상상을 하자 호기심이 발동하여 건물 안이 궁금해졌다. 나는 초라한 공업사를 지나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자 초라한 겉모습과는 달리 무척이나 화려하다. 갑자기 알록달록 화려한 광경이 내 눈에 펼쳐졌다. 벽에 칠해진 화려한 페인트 부터 사물 하나하나에 생기가 넘쳐있었다. 공업사와 외관만 보고 이 건물을 평가했던 내자신이 한심했다. 이 곳은 투자 가치가 넘치는 곳이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왔다. 이런 나와는 너무도 다른 이 사람들 속에서 나처럼 흑백사진인 사람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 맥없는 불안감으로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선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 놀고 있었다. 잘 차려입은 맘들과 품위와 교양을 겸비한양 한껏 우아를 포장한 늙은 원장이 도도하고 조금은 천박한 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삼삼오오 왁자지껄……. 이곳은 엄마들의 치마 바람이 광풍을 몰고 온 현장임이 틀림없었다. 유치원같아 보였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이용할 수 없을 호텔같은 시설. 이 낡은 건물 안에 이런 곳이 있다니. 역시 선견지명이 있는 부자들이 벌써 이곳을 알아보고 리모델링 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이 귀한 정보를 이제야 알게되다니. 나도 뒤 늦게라도 이곳에 들어 올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무지개 계단을 밝고 2층으로 올라갔다. 수영장이 있다. 역시 싱그럽고 화려한 색을 입힌 물놀이 시설들이 보는 사람의 눈을 현혹했다. 아이들은 어떤 규율도 없이 이리저리 헤엄을 치며 퐁당퐁당 자유롭게 놀고 있었다. 부자들은 오히려 아이들을 구속하지 않는다. 돈의 힘을 믿고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는다.
수영장을 다 둘러보고 다음 층으로 이동하려는데 비상구를 찾지 못했다. 나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가장 소탈하고 친절해 보이는 여자에게 위층으로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여자는 이곳은 아무나 올라갈 수 없고 내 개인정보(이 건물에 산다는 증거)를 등록하면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출입이 가능하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그 여자가 알려준 어린이 장난감같이 생긴 플라스틱 전자기기에 내 개인정보 등록을 시도했다.
삐삐삐——-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본다. 몇 번을 누르고 시도해보았다. 잘 되지 않았다. 답답했고 포기하고 싶었다. 역시 나는 이들 부류에 속할 수 없는 사람인가. 열등감이 솟구쳤다. 여자는 내가 난처해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와는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뽐내는 듯 보였다. 나는 무시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위층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도 커서 포기할 수 없었다. 맞다. 나에게도 이들 못지 않은 내 욕망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것이다. 그래서 저 위에는 무엇이 있는지 올라가서 꼭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 우리 가족이 이 곳에서 불이익 없이 살게 될테니까. 나는 내 알량한 자존심을 접고 여자에게 다시 다가가 물어보았다. 여자는 마지못해 하며 짜증스럽게 가르쳐 주었다. 휴우……. 겨우 해결을 했다. 나는 여자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기죽은 내 몰골은 한층 더 초라해 졌다.
나도 이제 이 건물을 드나들 통행권이 주어진 사람이다. 저 위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지친 마음을 이끌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이 건물의 분위기를 스캔했다. 2층부터 4층까지는 화려한 놀이공간과 수영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치 워터파크에 온 듯 했다. 아이들의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제 5층이다. 그런데 평범하고 현실적인 체육관이 나왔다. 아래층에 보았던 화려함과는 동떨어진 가난한 체육관이었다. 나는 실망했다. 이곳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도 외형적으로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시했다. 나의 형편없는 이중성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나는 아래층에서 내가 당했던 그 기분을 잊은걸까?
부끄러움은 잠시. 다음 층에는 무엇이 있을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들끌었다. 그러나 나는 위층으로 올라는 비상구를 찾지 못했다. 내가 서성거리자 체육관 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면 이 개구멍 같은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남자는 그 개구멍 같은 문을 열어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굳이 그 곳을 갈 이유가 있나요? 이 위쪽은 모두 다 이런 초라한 집들이에요.”
나는 개구멍을 통해 위층 집의 내부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고시원 같은 아주 작고 쾌쾌한 동굴 같은 방이었다. 나는 도저히 그곳에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나도 위쪽에 모두 이런 방이 있는 것이라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맞아요. 제가 그곳에 꼭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나는 저렇게 더러운 곳에 가고 싶지 않아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에요.”
나는 그곳을 완벽히 외면했다. 내가 상관할일이 아니었고 생각만으로도 피곤한 일이었다. 나는 아래층 부자들과 섞여서 사는 것이 훨씬 나은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나? 내가 굳이 왜…….
나는 1층으로 다시 내려왔다. 공업사 마당 앞에 서서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꼭 내 마음처럼 얄팍하게 하늘에 떠다녔다.
………….
5월의 햇살을 받으며 늦은 잠에서 일어났다.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