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서 보호자로. 치매 간병 10년의 기록
돌봄은 사회를 하나로 이어주고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아이를 키우고 환자를 간병하고 장애인을 돕고 죽어가는 사람을 지키며 우리 자신을 돌보기도 합니다. <care, 아서 클라인먼>
아서 클라인먼은 현재 하버드 대학교 정신의학, 의료인류학 교수이며, 정신의학, 의료인류학, 세계 보건의료학, 사회의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의학을 전공했지만 아서가 인류학에 관심을 둔 것은 아서의 아내 조앤의 영향이 컸다. 조앤은 항상 친절했고 따뜻한 사람으로 사람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관계의 삶, 포용적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아서는 조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조앤 클라인먼은 나를 치유했다. 천천히, 그러나 급진적으로 몇십 년 동안 그렇게 했다. 나를 타인을 신경 쓰는 사람, 돌보려 하는 사람, 돌봄을 주는 사람으로 훈련시켰다. 그 결과 내 안에서 크고 내밀한 행복이 생겨났다.”(212)
아서는 조앤과의 따뜻한 관계 안에서 기술보다 인간을 중시하는 의료학과 인류학을 연구하는데 더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 조앤이 55세에 치매에 걸렸다. 이 책은 정신의학 의사 아서가 치매 환자 아내를 10년간 간병한 기록인 동시에 그의 자서전이다. 그의 간병 경험은 그가 돌봄 분야의 전문성이 짙은 이 책에 자서전의 색깔을 입힌 이유로 보인다. 돌봄은 우리의 삶의 과정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맞는 날까지 돌봄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홀로 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서가 의사가 된 것은 10대에 만난 의사 벤의 영향이었다. 벤은 아서를 의사의 길로 인도하였다. 벤은 의학이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인 소명이며, 의학 치료의 근본적 핵심은 의사-환자와의 관계라고 믿었다. 의사와 환자와의 좋은 관계는 환자의 내면에서 활력과 치유의 힘을 끌어낼 수 있으며, 의사는 환자와 환자가족, 그들의 생활환경까지도 알아야 가장 효율적인 치료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환자를 치료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돌봄이라고 생각했다. 치료란 병명을 알아내고 약을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 개개인의 사정에 맞는 치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벤의 영향을 받은 아서가 의학을 인류학과 돌봄의 영역으로 까지 확대하여 평생 수학하고 연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돌봄과 같은 인간 중심의 치료에 관심을 기울였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아내 조앤이었다.
아서는 치매에 걸린 조앤을 직접 간병하면서 연구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았던 돌봄을 실행자의 위치에서 경험하게 된다. 의학이 돌봄을 제외시키고 이익을 내는 영리 집단으로 매몰되어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환자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을 가졌던 수습생과 신입 의사마저 의료계의 관료주의와 영리를 추구하도록 이끄는 의료시스템을 비판하면서 공공의료시스템을 위한 사회적 합의와 국가의 지원을 강조했다. 현재의 코로나 위기에서 미국의 의료복지의 구멍이 여실히 들어 났듯 10년 전 아서는 미국의 의료시스템이 백성을 향하지 않았음을 우려했다. 또한 아서는 사회복지사, 요양원, 공공의료 확대를 주장했으며 무엇보다 돌봄 인력을 전문화하여 사회적 지위를 높일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내가 현장에 있으면서 느끼고 생각해왔던 문제의식과 동일했다. 돌봄은 우리 사회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우리 사회는 돌봄을 여성 또는 하위계층의 일로 인식하고 취급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당연하고 숭고한 일인 돌봄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나는 국가를 사회적 돌봄의 실행기관으로 보는 아서의 관점에 동감했다. 국가와 우리 사회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인간이 공평한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에 있다.
아서는 “우리가 돌봄을 사회의 근본으로 받아들인다면,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 돌봄의 행위를 삶의 지혜로 보기만 원한다면, 이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정책과 프로그램을 만들고 하루하루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돌봄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면, 역사도 돌봄 쪽으로 구부러지지 않을까?” 라며 우리에게 생각의 변화를 요구한다.
외에도 아서는 돌봄의 윤리학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돌봄의 윤리학’, 내가 이 책을 찾아서 읽게 된 동기이다. 나는 돌봄 노동을 하고 있다. 돌봄 노동을 하며 내가 이 일을 하는데 적합한 사람인지 엄청난 자기 검열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보살피고 있는 아이는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이다. 나는 이 아이의 활동을 지원함에 있어 마음씨 좋은 아줌마로 무조건 친절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조앤과 같이 분노가 많은 아이였다. 아이가 나를 괴롭히기 위한 문제행동을 반복할 때에 난 이 아이가 미웠다. 이 미움의 기분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윤리적인 사람인지, 이 일을 계속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돌봄의 윤리학. 이에 관한 책을 찾다 보니 아서 클라인먼의 ‘care’를 발견하게 되었다. 먼저 조앤을 간병하면서 일었던 아서의 심경을 들어 보자.
“내가 장기 돌봄과 간병이라는 무거운 부담에 힘들게 적응해 나갈 때, 나 또한 이런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아픈 사람을 배려하고 한결같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힘들 때가 있었다. 조앤의 인지적 감정적 상태가 너무 심각하게 약화될 때는 가끔은 나 또한 좌절과 화를 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장기적인 하락을 보이는 알츠하이머 환자 한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을 보는 전문 의료인들이 치매환자와 간병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예의, 배려, 인간적인 따스함을 직접 유지하기 힘들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친절과 따스함이 없이는 고통과 압박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인간적인 관심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때, 가족이든 의사든 돌보는 사람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증거가 있다. 더 큰 목적의식이 생기고 번아웃도 줄여주고 감정적으로 소진되는 일도 의미 있게, 어떤 때는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는 나의 경험이기도 하다. 시간적 여유와 경제적 자원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인간에게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태도가 돌봄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장애가 있는 피 간병인도 돌봄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정반대로 무관심, 분노, 탈진처럼 우리를 갉아먹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면 돌봄의 관계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자칫하면 언어학대와 심리학대로 이어지며 때로는 신체적 폭력에 이르게 된다. 굉장히 어렵겠지만 돌보는 사람, 진료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혹은 가족이나 환자를 위해서라도 자기 기분의 변화나 위기신호에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돌봄은 나를 더 강한 사람으로 느끼게 했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더 잘 맺는 사람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 <63>
“나는 아무런 비판이나 판단 없이 그 환자의 경험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아무리 대하기 어렵다 해도 최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나와는 다른 한 명의 인간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장애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게 해주는 일들에만 집중했다.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이 과정을 함께 겪으면 그녀의 예측 불가한 행동을 내가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다.” <255>
순간순간 일었던 나의 감정도 아서의 심경도 모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자신은 없었지만 결심 한 바는 있다. 나를 교화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할 것, 섣불리 동정의 마음을 주기보다는 직업의식으로 해야 할 것, 그들에게 상처 주는 행위만큼은 절대 하지 않을 것.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서에 의하면, 돌보는 자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며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환자를 돌보려면 자기감정을 잘 알아차리고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나는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 있을 테니까. 돌봄의 일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하는 일인 것이다. 나는 그동안에는 책과 글을 통해 배움을 얻었지만 지금은 내가 돌보아야 할 ‘사람책’을 통해 성장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