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는 컨디션이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의례 반복하지만 요즘은 조금 더 힘에 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y가 새 학년이 되어 학교에서 y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바뀌었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 보조 선생님, 스쿨버스 기사님, 스쿨버스 보조 선생님 등.
발달장애아들은 새로운 환경을 맞을 때 처음엔 유순하게 행동을 한다고 한다. 낯가림으로 새로운 환경과 사람에 대해 나름의 적응과 파악의 시간이 필요해서. 우리들은 이런 시기를 속어로 ‘간을 본다.’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도 처음 본 사람과 낯선 환경에서는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하게 되듯 이 아이들도 그렇다고 한다. 살펴보면 발달장애아라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없다. 비장애친구들도 너무 잘해주면 선생님을 물(?)로 보기 때문에 처음엔 강한 카리스마를 어느 정도 보여줘서 기선제압을 한다고 한다. 너무 강하게 해도 무르게 해도 안 되고 카리스마와 따뜻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단다. 어른의 세계에서도 늘 그렇 듯 발달장애 아이들이라고 특별히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자기 절제가 부족하고 제어가 잘 되지 않는 행동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너무 많을 뿐.
y가 학교생활에서의 3월의 적응기가 지나고 4월이 되자, 선생님도 y도 서로에 대한 파악이 다 끝난 듯했다. y는 여리 여리하고 유약해 보이는 여선생님을 만만하게 여겼고(내게도 그랬다) 담임선생님은 생각보다 공격적이고 행동이 큰 y에게 적지 않게 놀란 듯했다. 우리는 ‘담임선생님이 y에게 완전히 눌렸다’로 판정했다. y의 담임선생님은 y의 행동에 크게 동요하고 있었고, y는 이 분위기를 기세로 아주 공격적으로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y는 정리되어 있는 물건들을 모두 흩어버려야 후련할 것이고, 물을 쏟을 것이고, 화가 나면 물건을 던지기도 할 것이다. 또 밥은 한 번쯤 주물럭거려야 욕구가 해결될 것이고 미디어를 보여 달라고 반복적 요구를 할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y가 학교에서 벌였던 우리가 이미 예측할만한 일들에 대해 시시콜콜 전달을 해왔고 y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들을 리 없는 어머니의 스트레스는 나날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문제가 불거졌다. 학교 측에서 y에게 자가 통학을 통보한 것이다. 1시간 정도 타고 오는 스쿨버스 안에서도 y행동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소리를 지르고 애국가를 부르고 안전벨트를 풀어 버리고 버스 앞쪽으로 튀어나가서는 기사 아저씨의 뒤통수를 때렸고 자동차 기어를 만졌다고 했다. y의 성향을 잘 알기에 나로서도 긴장이 되었다.
그렇더라도 제일 집이 먼 아이에게 스쿨버스를 타지 말라니. 권유도 아니고 일방적인 통보였다. 아이가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그랬을까 이해가 되면서도 나로서도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노력과 절차도 없이, y는 스쿨버스도 못 타는 소위 문제아로 낙인이 찍혀버린 것이다. y부모는 학교 측 제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스쿨버스 통학은 y가 당연히 누려야 할 학생권이지 않은가.
특수학교는 장애인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이다. 앞으로도 y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가 없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지금 y가 학교의 통보대로 자가 통학을 해버린다면 후에 y와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장애를 가진 친구도 스쿨버스를 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부모(개인)에게 고스란히 전가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y의 부모는 학교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곧바로 이 문제의 논의를 위한 운영위원회가 열렸다. 회의에 앞서 교감선생님은 y에게 보조교사를 따로 붙여서라도 스쿨버스를 탈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막상 회의에서는 행정부서에서의 반대로 보조 인력을 배치할 수 없다고 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우리는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었다.
‘y 한 명을 위해서 한 사람의 인력을 붙이는 것은 학교 측으로선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y의 요구(보조 인력을 y에게 붙여서 스쿨버스를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해 달라.)를 허용한다면 이와 같은 일이 다시 생길 때마다 사례가 되어 매번 학부모의 요구에 승인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특수한 아동의 사정을 존중해주는 것이 특수학교의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우리 사회는 개인보다는 단체를 먼저 생각하는 구조임을 우리 스스로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별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y가족이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스쿨버스 통학은 모두의 안전과도 관계가 있는 일이니까.
여러 고심 끝에 y부모는 마지막 제안을 하나 했다. y의 버스 탑승시간을 반으로 줄이는 방법이다. y를 버스노선의 중간지점에서 승·하차시키기로 했다. 그렇게 된다면 스쿨버스 보조 선생님도, 우리도 부담이 줄게 된다.(아침 승차는 아버님이 하차는 활동지원사인 내가 맞고 있다) 결국 이번 일은 서로가 양보하여 중간지점에서 승·하차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이렇게 분분했어야 했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절차와 상호 간의 협의가 빠진 학교 측의 통보 형태의 방법이 y부모에게 계속 불편함을 주었던 것 같다. 특수학교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대로 장애인 친구들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만약 학교의 입장이 행정적 이유라면 지역공동체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