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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헬로해피 Mar 11. 2021

돌봄의 윤리학

아서 클라인먼의 케어

내가 장애인활동지원사 일을 시작한 동기는 돈이 필요해서였다. 나는 일을 해야 한다는 필요욕구로 이 직업에 무조건 달려 들었고 무조건 하고자 했다. ‘직업의 귀천이 어디 있어? 내가 필요하다면 하면 되지.’라며 이 일에 도전했다. 그래서 애써 당당한 척 하려 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 있는 척 했다. 또한 의식적으로도 나는 꽤 괜찮은 돌봄 노동자라 자기체면을 걸며 일을 해왔던 것 같다. 그런 나의 자의식들이 밖으로도 나타났는지 주변 사람들 더러는 나를 직업의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를 했다. 그럴 때마다 조금 민망했다.  


내가 돌보고 있는 아이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아이의 활동을 지원함에 있어 마음씨 좋은 아줌마로 무조건 친절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만족을 얻는다. 친절한 마음 같은 것이 통하지 않는 아이였다. 상대의 친절함을 오히려 자기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겼고 자기를 길들이려는 사람에겐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문제행동을 동원해서 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주로 우리는 생활의 질서를 지키고 평화로운 일상을 위해 이 아이를 통제하기 마련인데, 아이는 오히려 우리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가게 만들었다.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주는 행위로 자기만족을 얻는 것 같았다. 아이가 나를 괴롭히기 위한 문제행동을 반복할 때에 난 가끔 이 아이가 미웠다. 이 미움의 기분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자기검열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정도의 마음을 써야 하는지, 내가 이 아이를 교육을 하는 입장인지, 돌봄의 역할만으로 선을 긋고 일해야 하는 것인지, 내가 윤리적인 사람인지, 이 일을 계속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자꾸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아서 클라인먼의 ‘케어’라는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정신과의사 아서의 아내를 치매 간병한 10년간의 기록이다. 이 책에는 돌봄에 관한 공공의 문제, 의료시스템의 문제, 개인의 문제까지 포괄적인 내용을 모두 담고 있지만 나는 여기서는 ‘돌봄의 윤리학’에 대해서만 언급해보겠다. 실제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돌봄의 연구자로가 아닌 치매환자의 간병인으로서 아서의 심경을 따라가는데 집중을 했다.     

     

어쩌면 나는 조앤의 침묵을 방치하고 내 시간을 갖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는 많은 주 간병인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방어기제라 할 수 있다. 내 나름대로는 나만의 시간이 거의 없어 힘겨워하고 있었다.(34p)   

퇴행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이따금, 어떤 아름다운 순간, 돌봄을 주는 것과 받는 것이 평행 상태에 도달한듯한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저 그랬을 뿐이다. 아픔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해야 할 일들이 줄어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가장 힘겨운 질병이 준비해 놓은 혹독한 현실과 심각한 한계 안에서도 우리는 행복했다.(47p)

내가 장기 돌봄과 간병이라는 무거운 부담에 힘들게 적응해 나갈 때, 나 또한 이런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아픈 사람을 배려하고 한결같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힘들 때가 있었다. 조앤의 인지적 감정적 상태가 너무 심각하게 악화될 때는 가끔 나 또한 좌절하고 화를 내기도 했던 것이다.(63p)

궁극적으로 한 인간에게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태도가 돌봄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장애가 있는 피간병인도 돌봄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정반대로 무관심, 분노, 탈진처럼 우리를 갉아먹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면 돌봄의 관계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자칫하면 언어 학대와 심리적 학대로 이어지며, 때로는 신체적 폭력에 이르게 된다. 굉장히 어렵긴 하지만 돌보는 사람, 진료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혹은 가족이나 환자를 위해서도 자기 기분의 변화나 위기 신호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64p)

돌봄은 인내에 관한 일이다.(67p)

이 두 여성은 서로를 모르지만 돌봄의 경험을 서술하면서 정확히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다. “내가 해야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완전히 그 생활에 나를 바쳤어요. (...) 그럴 수 있었던 내가 이제 자랑스러워요.(74p)

돌봄에서는 두 가지 감정의 줄다리기가 항상 일어난다. 돌봄이 무거운 짐이라는 생각과 그것이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 해도 궁극적으로는 보람 있는 일이라는 생각 사이를 오간다. 돌보는 이들은 이러한 양가적 감정을 따로 혹은 동시에 경험한다.(113p)

이 사회 곳곳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돌보는 사람이라는 역할로 돌아간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돌보는 형태가 가장 많지만 돌봄을 주고받지 않고 진공 상태로 존재하는 이는 거의 없다. 돌봄 – 옆에서 존재함, 마음 열기, 경청, 실천, 인내, 사람과 추억을 소중히 하기 – 은 가족과 친구, 동료와 지역사회에 잔물결처럼 퍼진다. 인간의 본질을 알려주는 이 돌봄이라는 달콤 쌉싸름한 이야기들이 세대를 거쳐 이어진다. 돌봄은 사회를 하나로 잇는 보이지 않는 접착제다. 분열과 파괴의 힘에 맞서는 일 또한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핵심이며, 이럴 때 돌봄은 이 세상에 선을 행한다.(142p)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이 과정을 함께 겪으며 그녀의 예측 불가한 행동을 내가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이다. 돌봄은 한쪽이 다른 쪽에 베푸는 방식으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호혜적인 속성이 있다. (...) 환자가 전문 의료진을 아무리 힘들게 해도 언제나 환자의 고통이 의사의 고통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255p)

 “환자의 고통과 치유에 대한 갈망이 이 관계가 유지되는 ‘레종 테트르(존재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안에서 의사인 나의 욕구와 상처는 스스로 인식하고 극복해야 한다. 대치 상황이 아무리 극단적으로 흘러도 나의 분노와 좌절은 나 스스로 조절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환자의 행동이 내게 주는 압박을 견뎌내야 한다. 적대감과 울분까지도 흡수해야 한다. 하지만 돌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상호적인 관계라는 점이다. 따라서 상대의 어떤 반응도 관계가 이어지게 하는 노력으로 이해해야 한다.” (256p)

누군가를 직접 돌보는 실질적 행동 안에 숨겨진 의미를 끌어내면, 그 일을 지속하면서 만나는 도전과 시행착오를 견디는 힘을 얻고 인생의 다른 시험에 대처할 수 있는 강인한 인간으로 단련된다.(프롤로그)

      

돌봄은 나를 단련하는 일이고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나의 기분의 변화나 위기 신호에 잘 반응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내가 질문했던 돌봄 윤리학에 대한 답이라 생각된다. 아서의 케어를 읽고 나는 힘이 났다. 내게 있었던 심적 갈등은 누구나에게 있을 수 있는 고민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수 있는 것이 나는 나의 기분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아예 낙제 점수는 아니었다. 그거면 내가 다시 용기를 내기에 충분했다. 다만 더 단단한 돌봄이 되려면 대치 상황이 아무리 극단적으로 흘러도 나의 분노와 좌절을 나 스스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절대적 신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신념이 내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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