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에 한 번 있는 대대 체육대회가 있던 날.
4개의 포대가 모여 서로 경쟁을 한다. 포대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일이라 예전에는 피 튀기게 치열했다고 하지만 요즘에는 그냥 맛있는 것 먹고 즐기는 날 정도로 생각한다. 물론 포대장 입장에선 우승을 하면 좋지만 안 해도 그만이다.
체육대회는 여느 대학 체육대회랑 비슷하다. 축구, 농구. 족구. 2인 3각, 계주 등을 하며 각 종목당 순위별로 점수를 매긴다. 그리고 종합 점수에서 1등을 한 포대가 우승이다. 한 가지 다름 점이라면 대회의 재미를 위해 대대장이 임의로 마지막 경기인 계주의 배점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 정도?
족구는 우승했지만 축구, 농구를 조기 탈락하면서 우승 가능성이 없어 보였는데 갑자기 계주의 배점이 바뀌면서 우승을 노려볼 만 해졌다. 아니, 막판 대역전 우승이 마지막 주자가 1등으로 들어오면서 거의 우승에 근접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자는 결승선 바로 앞에서 넘어졌고 기대도 안 했던 우승은 괜히 기대만 하고 말았다.
그렇게 체육대회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산규 대위 핸드폰 맞나?"
"네 맞습니다."
"아 그래. 나 OOO부대에 OOO대령인데 혹시 너희 부대에 OOO이라고 있니?"
"충성! 예, 며칠 전 전입 온 신병입니다."
"아니.. 뭐 별건 아닌데... 내가 아는 사람 아들인데 그냥 잘 있나 해서."
"네 아직 온 지 얼마 안 돼서 적응 중에 있습니다."
"그래 포대장이 알아서 잘하겠지. 별일은 아니고... 그냥 뭐 혹시 나중에 걔네 아버지랑 통화할 일 있으면 나한테 전화받았다고만 말해줘."
"아... 네 알겠습니다."
"갑자기 이런 전화해서 당황스럽겠다. 늙은이들이 참 유치하지? 유치한 건 아는데 그래도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하하. 네 알겠습니다. OOO아버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포대장아. 피곤할 텐데 쉬어."
"네. 충성!"
전화를 끊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전화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보통 이렇게 까지 말 안 하고 안부 정도만 묻고 끊는다.
지휘관을 하다 보면 이런 전화를 종종 받는다. 보통은 대령급 이상들이 전화한다. 우리나라가 좁다 보니 아버지뻘 되는 분들의 주변에 한 두 명씩 직업군인이 있나 보다. 행보관한테 물어보니 본인도 가끔 원사급들한테 전화를 받는다고 한다. 아무래도 아버지 뻘 나이에서 생각하시기엔 군대란 빽이 있으면 편해질 수 있는 곳이고 본인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서 아들의 군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게 효과가 있을까?
솔직히 이런 전화를 받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라고?"
물론 친했던 사람이 전화를 했다거나 직접 아는 사람이 병사로 들어온 것이라면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내 군생활 경험상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이런 전화를 받았다고 그 병사에게 특혜를 주진 않는다.(이 또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지휘관 입장에서 한 명의 병사에게 특혜를 준다는 것이 참 위험한 일이다. 솔직히 병사들이 바보도 아니고 정말 치밀하고 은밀하게 주는 게 아니고선 일부 병사에게 특혜가 가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렇게 될 경우 지휘관의 지휘 기반은 흔들리게 되어 포대 지휘에 어려움이 생긴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보면 하정우의 후임으로 중학교 동창이 들어온다. 처음엔 그 후임이 문제를 일으켜도 동창이라는 이유로 감싸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곤란한 처지에 처해지자 결국 그 후임을 구타를 하고 만다.
포대장이라고 크게 다를 것 없다. 본인의 사적인 인연으로 누군가를 감싸돌면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쌓이게 되고 나중엔 오히려 그 병사만 곤란한 처지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즘은 예전보다 마음의 편지나 국방부에 신고하는 일이 빈번하다 보니 만약 누군가의 신고로 조사라도 나온다면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 누가 책임을 물게 될 것인가.
그 상급자가 막아줄 수 있을까?
아무리 상급자라고 하지만 직속상관이 아닌 이상 큰 도움을 바라긴 힘들다.
얼굴도 모르고 앞으로 만날 일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급자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희생을 할 사람이 어딨겠는가?
직속상관이라 할지라도 국방부에 신고가 들어가거나 언론사에 제보가 된다면 둘 다 큰일을 치르게 된다. 굳이 신고를 당하지 않더라도 이런 지시를 하는 것 자체가 마찬가지로 지휘 기반을 흔드는 일이고 나중에 독이 되어 돌아온다. 그런 것을 잘 알기에 오히려 지휘관계에 있을수록 이런 말을 잘하지 않는다.
게다가 김영란법 시행 이후 까딱 잘못 말했다가 부정청탁으로 연루될 수 있기에 윗사람들도 조심하는 편이다. 그래도 사회에서의 체면이 있으니 아버지한테 전화 왔었다고 말해달라는 것 정도의 귀여운 부탁을 하는 것이다.
솔직히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전화를 한 그 대령 분도 사실 별로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령 정도의 계급이면 밖에서 봤을 때는 성공한 사람이고 군대에서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비치는데 흔히 말하는 '가오'를 주변 사람에게 상할 바에야 생판 모르는 나에게 상한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나중에 그 병사의 아버지와 통화할 때 굳이 그 대령분의 성함을 언급하긴 했다. 물론 그 병사에게 어떠한 혜택도 주지 않았다.
군대가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가 변하면 군대도 변한다.
병사들도 간부들도 새로운 세대들이 들어오면서 예전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다.
물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요즘엔 대놓고 부정청탁이 이루어지기엔 보는 눈들이 너무 많다. 따라서 입대 예정이거나 자식이 입대를 앞둔 분들이 군대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무조건 군생활이 편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