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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May 30. 2018

억울한 순간들

군생활 이야기

대학생 시절 먼저 입대한 친구들이 휴가 나오면 군대에서 있었던 썰을 풀곤 한다. 근데 생각보다 많은 수의 친구들이 군대 가면 한 번쯤 잘 때 모포를 뒤집어쓰고 운 경험이 있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너무 억울해서란다. 일병 때까지는 억울한 일들이 너무 많아 소등이 되고 컴컴한 생활관 안에서 혼자 숨죽여 우는 것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억울한 순간이 있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 되고 덤터기를 쓰거나 잘못이 부풀려져 소문이 나는 등등 그런 일들. 특히 군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 되고 변명하지 말라는 말로 묵살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음에도 말도 못 하고 혼자 삭히곤 한다. 나도 소위 때 억울한 일이 있었다. 


당시 간부들의 출근 군기강 확립에 대해 강조하는 분위기가 생겼고 한 번은 사단에서 간부들 출근 군기를 잡는다면서 복장 점검을 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인사장교였기 때문에 관련 게시물을 직접 전파받았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권장 복장

1. 상 하의에 전투복에 베레모

2. 상의 활동복, 하의 전투복에 활동모

위반 시 사단 아침 상황보고 시간에 명단 공개


1번 같은 경우 일반적인 복장이고 2번 같은 경우 하계나 작업 시 또는 아침체조 때 하던 복장이다. 당시 상의는 활동복을 입고 출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활동모를 안 쓰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를 결산회의 시간에 간부들에게 전파했고 체육활동을 마치고 퇴근하기 전 전투복 바지로 갈아입고 다음날 쓰고 올 활동모를 챙겨서 퇴근했다.


그리고 다음날. 그것은 대참사로 이어졌다.


다음날 상의 후드티에(간부는 활동복이 따로 없기에 그냥 사복을 활동복이라 칭한다) 하의 전투복에 활동모를 쓰고 출근을 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위병소에 나와 있는 인사참모가 보였고 난 꿀릴 게 없으니 당당하게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근데 인사참모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너 오늘 복장 점검한다고 들었어? 못 들었어?”


당연히 들었다. 근데 뭐가 문제였을까?


그때 내표정이 이러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내 후드티가 깔끔하지 못해서인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전투복을 입지 않은 게 문제였다. 인사참모는 소위 새끼가 빠졌다니 뭐라니 하면서 언성을 높여가며 나에게 뭐라 했다. 

내 기억에는 분명 어제 이 복장으로 와야 된다는 게시물을 전파받았는데 뭐가 문제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소위였기에 중령이 노발대발하는데 주눅 들어 쉽사리 반박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언성이 높아지자 위병조장실에 있던 사단 보임 장교가 나왔다. 내 기억엔 어제 그 게시물을 전파했던 사람이다. 그 사람을 보고 분명 어제 그렇게 전파했으니 나를 커버 쳐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인사참모는 보임 장교한테 해당 부대에 통보하라고 지시했고 그 사람은 ‘예 알겠습니다’ 하고 연대에 통보했다.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도 분명하게 보고 활동모까지 챙겨 나왔다. 

한바탕 꾸지람을 듣고 연대에 도착해서는 다시 연대 지원과장한테 끌려갔다. ‘왜 그런 복장으로 왔느냐’는 질문에 그제야 어제 줬던 게시물에 대해 설명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어이가 없었다. 


그것은 작업하러 위병소를 나갈 때의 복장이고 출근 복장은 전투복이 맞다고 한다. 아니, 그러면 그렇다고 써놔야지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없으면서 그걸 잘못 해석한 니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연대지원과장은 사단 인사참모한테 전화해서 ‘얘가 뭘 잘못 알고 실수한 거 같다. 연대에서 교육할 테니 상황보고 시간에는 올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정말 사람 병신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분명 그렇게 전파받았고 그대로 했는데 병신 취급당하는 것이다. 또 이런 소문은 순식간이라 연대 전체에 소문이 났다. 당연히 대대장님에게도 관련 내용이 전해졌고 별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담아둔 것 같다.(실제로 나중에 다른 실수가 있었을 때 이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겨우 사무실로 돌아와 억울한 나머지 그 게시물을 찾아봤는데 내가 본 그대로였고 미처 못 본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게시물은 밑에 사람이 만들었기에 상급자인 인사참모는 보지도 않았고 연대 지원과장 역시 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대대장도 대충 보고 넘기고 복장 점검한다고 하니 당연히 전투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의 상식대로 군기강 확립이라고 하면 전투복으로 출근하는 게 당연한 건 맞지만 게시물을 그렇게 뿌린 이상 그게 내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변명은 연대지원과장이 아닌 인사참모에게 해야 했고 타이밍을 놓친 이상 돌이킬 수가 없던 것이다.


살다 보면 억울한 순간은 어쩔 수 없이 생기지만 그것을 그냥 참고 넘어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정말 억울하면 할 말은 해야된다. 그냥 넘어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나한테 돌아오기 때문이다. 당시 그 자리에서 변명을 했다고 해도 과연 그 사람이 수긍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긴 한다.(원래 화를 내고 있을 때 반박하면 화낸 사람은 민망해서라도 그 반박을 쉽사리 수긍하지 않는다.) 그래도 말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을 탓하지만, 말을 안 하면 자책을 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까지 나를 뭐라 할 필요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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