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캡틴 Nov 23. 2018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군대상식

2010년 11월 23일. 

우리는 끊임없는 북한의 도발을 봐왔지만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자국의 영토가 공격당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 해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이 채 잊히기도 전에, 북한은 매년 해오던 호국훈련을 핑계 삼아 170여 발의 포탄을 연평도에 퍼부었다. 그 결과 군인 2명 사망, 16명 중경상, 민간인 2명 사망, 3명 중경상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상상도 못 할 일이 일어났고 국가적으로 전쟁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당시 연평도 사진


당시 분위기

그때는 후보생 신분이었기에 야전의 분위기는 알지 못해서 실감이 나진 않았다. 단지 다른 민간인처럼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군단에서도 특별한 공지는 없었고 휴가 나온 친구도  부대에 복귀해야 되는 거 아닌지 물어봤는데 그런 지시는 없었다며 휴가기간을 다 채워서 복귀했다. 그렇게 당시 군사교육 시간에 전쟁이 날 경우 후보생들이 어떤 절차에 의해 야전으로 투입되는지를 교육받았던 것 빼곤 특별한 게 없었다. 

입대 후 선배들의 말로는 끝없는 대기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집에도 못 가고 부대에서 먹고 자면서 마냥 대기하다가 지나갔다고 했다.


13분 논란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 13분이라는 대응 시간을 갖고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이는 포병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고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비난이다.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시간이면 훈련된 부대라고 했다.(이 분도 포병 출신이다) 포병의 화포는 소총처럼 총알 넣고 당기면 발사하는 그런 단순한 구조아니다. 당시 호국훈련 중이라 화포를 돌려놓고 실탄을 빼놨다고 했는데 상황에서 13분은 당시 즉각 대기라는 개념이 없던 것을 감안해서 정말 훈련이 부대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현장 상황은 알지도 하고 파악하려고 하지도 않고 글씨 몇 줄 보고 비난부터 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정치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갑작스러운 적의 포격을 맞는다면 아마 혼비백산이 됐을 것이다. 다친 사람도 생겼고 사망자도 발생했다. 그런 상황이면 아무리 군인이라도 실전을 겪은 적이 없기에 전장 공황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연평도 부대를 맡고 있던 포대장은 포격을 받고 난 후 연병장 한가운데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즉각 사격준비하라"


상황을 수습하고 사격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대포병 감지 레이더가 꺼진 상황이라 정확한 타격 원점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임의의 지역을 선정하고 포구를 돌려야 하는데 화포는 곡사화기라서 눈에 보이는 대로 쏘는 게 아니라 포물선을 계산해서 쏘기 때문에 사격제원을 산출하는데 시간이 걸린다.(사격제원을 계산할 땐 각 화포의 성능, 날씨, 탄의 종류, 장약 온도 등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다) 그 제원을 받고 포구를 돌려서 조정하는데 포탄이 화포 안에 없는 상황이라 포탄도 옮겨야 했을 것이다. 참고로 포탄 하나의 무게가 40kg가 넘는데 건장한 남자도 혼자 들기 벅차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사격을 끝낸 상황에서 교전수칙에 따라 대응해야 하기에 사격명령이 안 떨어졌다. 사격명령이 안 떨어지자 한 포반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사격 준비 끝이라는 보고를 몇 번이나 했다고 한다. 


당시 한 해병대원은 방탄헬멧에 불이 붙은지도 모르고 사격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 이후의 변화

당시엔 몰랐지만 연평도 포격도발은 포병이라는 병과를 변화시킨 엄청난 사건이었다. 사실 이전까지는 보병 가기 싫은 사람들이 최후의 보루로 가는 병과로 포병은 보병보다 편한 병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즉각 대기라는 것이 생기면서 이제는 보병보다 더 기피한다고 한다. 즉각 대기란 북한의 화력도발을 대비하여 즉각적으로 대응 사격할 수 있도록 대기하는 것이며 사격명령이 떨어지고 5분 이내에 사격준비를 완료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별거 아닌 거 같지만 당사자들은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잠잘 때를 제외하곤 전투복으로 대기하며 수시로 훈련상황이 주어져 포상까지 미친 듯이 뛰어가서 사격준비를 해야 한다. 게다가 상급부대에서 임무수행 상태를 점검한다며 찾아와 들쑤셔놓고 가서 피를 말린다.(군단장까지 온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휴전 국가라는 점에서 보면 당연한 대처이다. 어찌 보면 연평도 포격도발 후로 우리가 북한의 기습에 대한 대비가 갖춰진 셈이다. 우리는 그 날을 교훈 삼아 더 이상 희생자가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8년이 흘렀다. 

군대에선 매년 연평도 포격도발 주기에 맞춰 결의 대회를 한다. 결의 대회란 전 부대원 앞에서 A4 한 장 분량의 결의문을 읽는 정도로 별것 아니지만 우리가 그 사건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잊지 않고 적의 도발에 강력하게 대응해야 함을 되새기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는 그 사건을 누군가는 이렇게 기억해줘야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위병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