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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Mar 10. 2019

대리 임무

군생활 이야기

장교들은 1년에 한 번씩 보직의 연쇄이동이 일어난다.

참모 보직 같은 경우 보직 기간이 1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때쯤 새롭게 전입 오는 사람들도 있고 부대 내에서 보직만 옮기는 사람도 있다. 가끔은 자리가 빈 채로 사람만 떠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주요한 보직이 아니면 그냥 빈 채로 놔두지만 주요 보직의 경우 누군가 '대리 임무'를 해야 한다.    


솔직히 작전보좌관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1년만 하고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뜻과는 별개로 '각'이 안 나왔다. 그 이유가 나보다 먼저 정작과장님이 바뀌기 때문이었다. 

작전과 간부는 나와 정작과장님, 후임인 교육장교 3명이 있다. 후임은 아직 소위이고 정작과장님이 바뀌는데 나까지 보직을 변경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정작과장이 오기로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정작과장님이 연대로 가게 되었고 그 대리 임무는 그전까지 병력 관리를 하던 선임 포대장이 맡게 되었다. 

선임포대장이라고 하지만 작전과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옆에서 보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선임 포대장 마저 맡은 지 3개월 만에 다른 부대로 발령이 났고 다시 정작과장 대리 임무를 정해야 했다. 정작과장이라는 직책은 대대장님과 소통하여 대대 참모부를 조율하는 역할이기에 대위급이 맡을 수 있는 보직이었다. 전방부대에서는 '작전과장'이라 칭하며 소령급이 맡는 보직이다. 

당시에는 두 명의 포대장이 있었는데 한 명은 전역을 앞둔 포대장으로 지원과 참모업무를 하고 있었고 또 한 명은 육사 출신 포대장으로 병력 관리를 하고 있었다. 전역을 앞둔 포대장은 그 직책을 맡기 싫어했기에 당연히 육사 출신 포대장이 그 직책을 맡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리 임무자는 한낱 중위 나부랭이인 '나'였다. 즉, 앞으로 대대를 대표해서 연대 회의에 참석하고 포대장들을 비롯한 참모부들을 컨트롤해야 하는 역할이 나한테 주어진 것이다. 대대장님 말로는 '그동안 오랫동안 작전과에 있었으니까 믿고 맡긴다'였지만 의중은 대대장 역시 전역을 앞두고 있기에 명예전역을 위해서는 병력 관리에 더 신경 쓰고 있었을 것이다. 


중위와 대위와 한 계급 차이지만 차이는 크다. 중위에서 대위로 올라가면 고등교육을 수료하는데 이를 받았냐 안 받았냐가 초급간부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또한 대위에서 다음 계급으로 올라가려면 최소 7년을 해야 하므로 같은 대위라도 격차가 크다. 

영화 고지전에 나오는 중위(좌)와 대위(우). 전시라면 유고시 중위가 대위 임무를 수행하겠지만 평시에 중위가 대위 보직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부대에 오래 있었던지라 인접대대 정작과장들이랑 친분이 있어 업무 협조는 가능했지만 연대에서 보는 시선은 영 못 미더웠다. 그래서 초반에 연대회의를 참석하게 되면 연대 정작과장이 '대위급 간부를 데리고 오라'며 무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일부러 어려운 질문을 하며 '간'을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럭저럭 몇 주를 버텼는데 어느 날 대대 정작과장들한테 한 가지 미션이 떨어졌다. 연대장님과 4개 대대장님들 앞에서 대대 정작과장들이 한 가지 주제씩 맡아서 발표를 하는 일이었다. 중위 나부랭이가 선임급 대위들 사이에 껴서 연대장님 앞에서 발표를 한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안 할 수도 없었다. 사실 중요도가 그렇게 높은 미션은 아니어서 다른 대대 정작과장들도 설렁설렁 준비했는데 난 사력을 다 할 수밖에 없었다. 잘하는 것 까진 안 바래도 최소 욕은 먹지 말아야 했다.

예전에 과장님이 쓰던 자료들을 뒤지고, 여기저기 물어보기도 하고, 작계를 파헤쳐가며 자료를 만들었다. 대대장님한테도 몇 번을 검토받은 끝에 겨우 통과했다. 

그리고 발표 당일 연대 지통실에 주요 간부들이 모두 모였다. 연대장님, 대대장님들, 연대 참모부, 대대 정작과장들 등등 사이에서 혼자 중위 계급장을 달고 앉아 있으니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어찌 됐든 발표는 시작됐고 1대대부터 차례대로 지나갔다. 다행히 큰 실수는 없었다. 어찌어찌 회의가 끝나고 대대로 올라가는데 진이 빠졌다. 어떻게 오늘 하루도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잘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애초 계획대로 평타는 쳤던 것 같다. 하지만 대대장님이 보셨을 때 대위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고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회의가 끝나고 잘했다며 칭찬을 하셨다. 내 기억으론 아마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던 것 같다.  


그 후 대대장님이 바뀌었고 고군반(OAC) 입교를 앞두고 있어서 육사 출신 포대장이 정작과장 임무를 맡게 되고 다시 작전보좌관으로 돌아갔다. 3개월 정도로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경험 덕분에 고군반 교육을 받을 때나 포대장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역량을 넘어서는 일을 맡게 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당시에는 힘들지라도 멀리 보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뛰어 놓으면 그래도 나중에 걸을 여유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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