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의 병영일기
계급이 올라갈수록 맡는 직책이 다르듯 당직 때 맡는 역할 또한 바뀐다. 소위 때는 당 직부관 중위 때는 당직사관을 섰는데 대위가 되다 보니 당직사령을 맡게 됐다.
당직이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역할에 따라 임무도 다르고 책임이 다르다. 당직사령은 부대장을 대신하는 역할로 당직근무 간에 일어난 모든 일에 책임을 지게 된다. 따라서 부대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대 전입 후 당직 경험이 있을지라도 바로 당직에 투입되지 않고 일정 시간 적응 기간을 거친 다음에 투입한다.
나 역시 2주의 적응기간을 거치고 당직에 투입해야 했고, 당직사령은 처음이고 상비사단도 처음이다 보니 첫 근무를 투입하기 전 선임 포대장과 동반 근무를 서면서 배워야 했다. 물론 소위 때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흐름을 보는 정도였다. 그래서 배우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첫 근무에 투입되면서도 크게 걱정은 없었다. 어차피 돌아가는 건 거기서 거기이고 웬만하면 실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상급부대에서 훈련상황 정도나 주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일요일 아침.
출근해서 전임 근무자에게 인수인계를 받고 대대장님께 근무교대를 보고하고 투입했다.
화상으로 연대 당직 회의를 했고 회의 간 나온 강조사항을 포대에 전파한 뒤 병력들 종교활동을 보내고 앉아 있었다. 그냥 예전과 별 다를 것이 없는 당직근무였다.
점심을 먹고 잠시 한가할 시간.
당직부관과 PX에서 무엇을 사 올지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본부 포대 당직사관이 지휘통제실로 들어왔다. 아직 다른 포대 간부들과 친하지 않았고 표정 역시 잡담을 하러 내려온 것 같지 않았다.
"저기 포대장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너무도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에 뭔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네? 무슨 일 있습니까?"
"저... 본부 포대 인원 중에 한 명이 자살시도를 했습니다."
"자실시도요?"
자살 시도라 하면 다른 부대 사고사례를 통해 전해 듣기는 하지만 군 생활하면서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아마 그때의 내 눈은 태어나서 가장 동그랗게 뜨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자실 시도한 인원은 원래 특별 관리하고 있던 인원이었다.
당직사관이 근무를 서고 있는데 그 날따라 뭔가 불안한 듯 행정반을 계속 들락날락거렸다. 당직사관은 볼일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신경 쓰여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냥 가려고 하는데 평소 그 인원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불러내서 무슨 할 말 있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사실은 자신이 자살시도를 했다고 말했다.
어제 외출 간에 약국에서 수면유도제를 몰래 사 갖고 들어와서 한 번에 10알을 삼키고 자신도 불안했는지 행정반을 계속 왔다갔다한 것이다.
놀란 당직사관은 화장실에 가서 구토를 유도했으나 구토가 나오지 않아 일단 의무대로 보내고 지휘통제실에 와서 보고를 한 것이다. 의무대로 들어가니 의무병 옆에 많이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아직 구토를 안 했다고 해서 화장실로 데려가 구토를 유도했다. 토를 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줬다.
혀를 쭉 빼고 목구멍을 넓혀보라고 하니 헛구역질을 몇 번 하더니 안 나온다고 했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으라고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구토를 했다. 식사를 걸렀는지 내용물이 없이 투명한 액체만 나왔고 이상한 단내 같은 것이 났다.
일단 급한 대로 조치했으니 대대장님께 보고를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대대장님의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뭔가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일단 군의관과 통화해서 조치를 받으라 해서 통화를 했다. 군의관 말로는 수면유도제라서 수면제 같이 많이 먹는다고 죽을 확률은 거의 없고 구토까지 했으니 당장은 괜찮을 것이라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당직 군의관에게 데려가 보라고 했는데 대대장님은 그걸 원치 않았다. 당직 군의관은 다른 부대에 있어 가게 될 경우 연대에 보고 해야 하고 그러면 연대장님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대대장님은 아무래도 옛날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자살시도는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자살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정신과 상담이나 전문상담관 상담 같은 조치를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살 시도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살시도는 보고를 안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고 했고 지금 조치를 안 하는 것이 더 큰 문제로 이어질 것이 뻔했다. 대대장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엔 보고를 하지 말라고 하더니 연대장님께 본인이 먼저 보고를 할 테니 그 후에 조치를 취하라 했다. (당시 연대장님은 강성인 분이셨기에 대대장님도 약간 쫀 게 아닌가 싶다.)
흔히 군대에선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진급에 영향을 미칠까 봐 숨기기 급급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살시도 자체가 진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을 숨기고 조치를 안 하다가 자살사건으로 이어지면 그것이 진짜 문제가 된다. 사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고가 문제이고 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부대에선 어떤 조치를 취했나 등의 인과관계를 따져보고 책임이 있을 때 불이익이 가는 것이다. 자살시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지휘관인 대대장이나 당직근무자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는다.
자살 시도했던 병사는 당직 군의관 진단 결과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었고 긴급 소집된 본부 포대장과 면담을 하고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 친구는 그 후 다시 자살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군생활을 계속하지도 않았다. 그 후 한 달 뒤 의가사 처리가 되어 전역을 했다.
한 측에서는 수면제도 아니고 수면유도제로 쇼를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그게 쇼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당사자의 관점으로 봐야 했고 당사자의 의도는 알 수가 없기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는 더 이상 지휘에 부담이 되는 병사들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는다.
첫 당직부터 큰 일을 치르고 나니 당직 서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생겼다. 그날도 불안해서 순찰을 1시간에 한 번씩 돌았고, 난 대대에서 빡센 당직사령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