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말벡의 시작
아르헨티나 말벡의 시작
우리는 아르헨티나 포도 재배학의 선구자인 미셸 에메 푸제(Michel Aimé Pouget)를 알아야 한다. 1863년, 그는 생테밀리옹에서 대량의 말벡 나뭇가지를 아르헨티나 멘도사로 가져왔다. 이는 아직 필록세라가 터지기 전이다. 프랑스 출신 포도 품종학자인 푸제는 자타공인 남미 와인의 선구자이자 아르헨티나 이전에 칠레의 와인 판도를 바꾼 장본인이다. 그는 1840년대에 동료 와인 전문가들과 함께 칠레를 방문했다. 그리고 칠레 최초로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말벡을 산티아고의 포도밭에 심었다. 그의 손에서 칠레 와인의 역사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칠레에 있을 당시 아르헨티나의 정치인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칠레에 유배를 온 상황이었다. 이때 도밍고는 푸제의 연구에 감명받아 그에게 아르헨티나의 와인 산업을 이끌어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맨입으로 되겠는가? 사르미엔토와 멘도사 주지사는 멘도사에 퀸타 노르말(Qinta Normal) 와이너리를 설립하고 푸제에게 운영 전권을 제안한다. 그리고 푸제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온갖 포도나무 가지들을 바리바리 챙겨 멘도사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사르미엔토는 훗날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다(1868 ~ 1874).
1853년 4월 17일은 푸제에 의해 말벡이 아르헨티나 땅에 도착한 공식적인 날이다. 아르헨티나 와인 협회(Wines of Argentina)는 말벡을 아르헨티나 와인의 정체성으로 확립하기 위해 2011년에 4월 17일을 ‘세계 말벡의 날’로 지정했다. 그리고 2020년 현재까지 전 세계 60개 도시에서 말벡과 아르헨티나 음식을 즐기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아르헨티나 말벡의 시련
멘도사의 안데스 사막은 아르헨티나 서쪽에 위치하며 매우 덥고 건조하다. 때문에 낮은 산도가 항상 골칫덩이였다. 20세기 초, 말벡은 멘도사 포도밭의 75%를 차지했는데, 매년 수백만 페소가 타르타르산(Tartaric acid)을 구매하는 데 사용되었다. 산도 문제 때문에 말벡을 타나(Tannat)로 바꾸자는 주장도 제기될 정도였다. 당시 타나는 우루과이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고 있던 고품질 적포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벡은 멘도사 전역에서 널리 뿌리내렸다. 안데스 사막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질병, 벌레, 곰팡이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이 되자 말벡을 심은 포도밭은 120,000 acres(1억 4,690만 평)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1970~80년대로 들어서자 아르헨티나 와인 소비의 75% 이상이 화이트 와인으로 바뀐 것이다. 시장 수요가 바뀌면서 포도밭에서 말벡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대량 생산이 가능한 청포도가 차지했다. 페드로 히메네즈(Pedro Gimenez), 크리올라(Criolla)가 대표적이다. 생산량이 낮았던 말벡은 1970~1990년대 동안 20세기 중반의 면적보다 80% 감소한 25,000 acres를 기록했다. 그렇게 말벡은 사라지는 듯했다.
1990년대까지도 아르헨티나의 양조 설비는 열악했다. 오크 배럴은 비위생적이고 압착기는 거칠었으며, 발효조는 온도 조절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단계마다 산소 노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완성된 와인에서 셰리 같은 산화 캐릭터가 나기 일쑤였다. 와인 스펙테이터는 트라피체 말벡 1988 빈티지에 74점을 줬을 정도. Mal(나쁜) bec(입, 부리)라는 조롱마저 당했다. 당시 말벡은 아르헨티나가 숨기고 싶은 아픈 꼬리였다. 아르헨티나 와인계의 대부 니콜라 카테나(Nicolas Catena)조차도 당시에 말벡을 2등급 포도라고 폄하했다. 니콜라를 포함한 모두가 말벡의 산화 캐릭터를 품종의 문제로 치부했다. 사실은 노후한 양조 시설 때문이지만 말이다.
아르헨티나는 철저하게 프랑스를 따라 했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샤르도네를 재배하고 프랑스인 와인 컨설턴트로부터 자문을 구했다. 어찌 보면 “프랑스에서 실패한 말벡”이라는 꼬리표가 아르헨티나 포도 농부들에게 색안경을 씌운것일 수도 있겠다.
이어서 아르헨티나 말벡의 부활을 써내려가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