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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태현 Aug 10. 2020

필록세라에 관하여 (3-1)

판도라의 상자

아르헨티나의 말벡은 뿌리부터 가지까지 100% 프렌치 오리지날이다. 필록세라가 보르도에 퍼지기 전인 1853년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이 뿌리 진드기가 프랑스 땅을 처음 밟은 날은 “1862년 어느 봄”이었다. 프랑스 와인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 터지기 9년 전에 아르헨티나 땅을 밟은 것이다.

1862년 따스한 봄날, 프랑스 론 밸리 우안의 작은 마을 “로크모어”(Roquemaure)에 사는 와인 상인 보티(Borty)는 밀봉된 상자 하나를 받는다. 1년 전에 미국 여행을 하다 만난 친구 칼(Carl)로부터의 선물이었다. 칼은 보티의 직업을 듣고 미국 본토의 포도나무 묘목을 보내주겠다고 말했는데, 보티는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하며 까맣게 잊고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고, 예상치도 못하게 정말 묘목이 도착했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는 영원히 봉인돼야 했었다.

보티는 설레는 기분으로 상자를 열고 포도나무를 집 앞마당 정원에 심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다음 해 여름, 몇 km 남쪽에 위치한 포도밭의 잎이 노란색으로 변하더니 뒤이어 빨간색으로 바뀌고, 가을에는 모든 잎이 다 떨어져 버린 것이다. 죽은 나무를 뽑아서 살펴봐도 이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당연히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 괴이한 일은 금세 지중해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보다 포도나무가 죽어가는 속도가 더 빠른 듯했다.

어린 나무, 나이 든 나무, 추운 지역과 더운 지역 가릴 것 없이 전부 죽어나가니, 언론에서도 난리가 났다. 일부 수도사들은 심판의 시간이 도래했다며 신을 버리고 과학을 택한 이들을 저주했다. 심지어 로크모어 마을의 고위 공무원이었던 막시밀리안 리차드는 로마 3세기경의 사제였다는 성 발렌타인(Saint Valentine, 발렌타인 데이의 그분이다)의 유물을 로마에서 직접 구해 로크모어 교회로 모셔왔다. 성인의 유물이 보이지 않는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길, 신의 손길이 죽은 포도나무를 부활시켜주길 모두가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이들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을까?

안 통했다.

1868년 7월 15일, 몽펠리에의 식물학자 줄 에밀 플랑송(Jules-Emile Planchon)은 로크모어의 죽어가는 포도밭을 조사하던 중, 아직 멀쩡해 보이는 포도나무를 실수로 파내게 된다. 곡괭이 질을 잘못해서 나무가 뽑혔다고 하는데, 이 나무의 뿌리에 노란색 가루가 묻어있더라는 것. 맨눈으로 잘 보이지 않아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본 후 그는 극도의 충격과 공포를 마주했다. 엄청난 숫자의 노란색 벌레들이 뿌리를 갉아 먹고 있던 것! 그야말로 신의 곡괭이 질이 아닐 수 없었다.

플랑송의 충격적인 발견 이후, 이 벌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뿌리의 수액을 빨아먹는 이 진드기는 보티가 택배로 받았던 미국 포도나무 묘목에서 퍼져 나간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이 진드기가 바다를 건널 때까지 살아있던 걸까?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과학 기술의 발전 때문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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