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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Mar 11. 2024

그대, 어느 섬에 살고 있는가?

- 나는 섬에 산다


# 섬 그리고 섬(島)

- 당시까지 섬에 가본 적이 드물던 내게 '섬'은 학교 앞 카페 상호 혹은 알베르 카뮈의 서문이 붙은 장 그르니에의 책 제목과 등치됐다. 섬다운 섬엘 간 건 그 후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어느 섬이었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 위에 뜬 연꽃 같았다는 첫인상이면 충분했다. 섬에서의 첫 날밤, 그 고립감에 정신이 또렸했었다. 섬은 동사 서다의 명사형이다. 더 이상 갈 곳 없어 발길을 멈추게 하는 섬(島)과 동음이다.   

ⓒ 스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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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물을 걸러내다

- 물이 적어 '시리섬'이라 불린 전남 신안군 증도는 2007년 담양, 청산도와 함께 아시아 최초로 지정된 '슬로시티'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이 섬엘 간 건 2010년이었다. 연륙교가 놓아져 쓸모가 사라진 지도읍 송도 철부선 선착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연륙교로 연결된 섬들은 섬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 증도의 '태평염전'은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 구제와 소금 생산 증대를 목적으로 조성됐단다. 두 섬을 둑으로 연결해 그 사이에 생긴 간척지에 염전을 만들었던 것. 길섶에서 적당히 붉은 낯으로 손님을 반기는 꽃과 염전, 기름먹인 목조 소금창고가 줄지어 선 풍경이 이채로웠다. 그런 풍경에 취해 소금밭에 굵은 땀방울을 떨구던 일꾼들의 휜 등을 눈여겨보지 못했었다. 슬로시티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치따슬로(cittaslow)다. 번역하면 '행복공동체'라는데, 그들에게도 그 섬이 행복+공동체였을까?   

ⓒ 스침

# 화가의 섬

- 누가 심지 않아도 해마다 풍작인 함초를 등 뒤에 남기고 서둘러 증도를 떠 목포로 향했었다. 수화(樹話) 김환기의 생가가 있는 신안군 안좌도로 가기 위해서였다.


- 목포에서 한 시간 남짓 뱃길을 타야 안좌도에 입도할 수 있었다. 객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 뒤따라 짐 보따리를 들쳐 맨 범상치 않은 사내가 들어오더니, 객실 바닥을 점령했다.


  "엥간히 덥지라? 어머니들 팔뚝 타서 속상하지라? 토시 하나 사쇼! 이게 겁나게 좋다 안하요."


- 구수한 사투리에 걸진 입담으로 넋을 빼놓는 사내의 보따리에서는 촌로들을 위한 필수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20개 들이 파스며 시골 아낙들을 위한 몸뻬바지, 논밭을 헤집고 다녀도 아깝지 않을 싸구려 운동화까지 없는 게 없었다. 섬사람들을 위한 장돌뱅이 덕에 외지인의 뱃멀미도 덩달아 날아갔다.


ⓒ 스침

 

ⓒ 스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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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 김환기. 한국 서양화단의 1세대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는 "한국 추상 미술의 으뜸이지만 현실도피적이고 역사 감각의 부재를 보여준다"를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게 그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지만 부농의 자식이었고 당시 우리의 척박한 현실과 동떨어진 일본과 파리, 뉴욕에서 상당 시간을 보냈지 않은가. 그러니 그의 서정성은 안좌도에서 잉태되었으나 땅을 밟고 있지 않은 것이리라.


"길 따라 조금만 가면 그분 생가가 나오지라."


- 쾌청한 날, 수화의 그림에 등장하는 시골 아낙네들을 형상화한 조각들 곁으로 그 후손은 길을 일러주고 빨간 플라스틱 바께쓰를 들고 무심히 지나갔다. 그리고 길가엔 낡은 배 한 척이 화분이 되어 있었다.


- 잡초를 뽑다가 무심히 야생화를 툭 잘라낸 동네 아주머니더러 "아이고. 꽃이 아깝네요" 하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젊은 양반, 고로코롬 아까우면 머리에 꽂아드릴까잉?"


야생화는 도시놈에게나 귀한 것이지 그들에겐 잡초나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거기서 만난 이들 모두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상대가 안될 땐 줄행랑이 상책임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 스침

-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대자연과 다시 접촉하면서 자연 속에 푸근히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자신들을 살찌우는 정기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 -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 가끔 난 자문한다. "그대, 어느 섬에 살고 있는가?"하고. 내 안의 섬은 어떤 풍경인가? 그 섬에 사는 이들은 모두 안녕한가? 나는 섬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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