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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Mar 13. 2024

서둘러, 봄

- 에디터의 겨울

ⓒ 스침

# 우연한 술자리

- 프리랜서에게 시간은 입출금이 자유로운 통장이다. 밤샘이 디볼트값일 때도 있지만 늦은 밤, 술 대신 바다가 동(動)하면 가방 하나 난짝 들고 떠나면 그만이다. 부러워할 일은 아니다. 자기 통제가 정교해야 한다. 


- 그런데 시간도 떠남도 달갑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봄호 잡지를 위한 겨울 취재가 그렇다. 늦어도 1월이 마감인데, 겨울 한복판 어디서 봄기운 살살 도는 사진을 찍는단 말인가. 제주는 물렸고, 어디 없을까를 고민하다 에디터들이 몰렸던 곳이 청산도였다. 지금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전엔 그랬다.


- 위도상 봄을 먼저 맞는 청보리밭의 청산도에 가려면 완도에서 배를 타야 한다. 첫배를 타기 위해 전날 밤 완도에 도착했다. 허기도 돌았고 객지의 한 잔 술 생각에 입술이 달싹거렸다.


- 선택의 고민은 없다. 가본 집이 없으니, 시선 꽂힌 횟집 문을 열었다. 모든 식탁에 수저가 놓여 있지 않았다. 회 한 접시와 소주를 달랬더니, 일행 없음을 파악한 주인이 "혼자 다 못 먹어요. 멍게랑 뭐 그런 거 적당히 드릴 테니 한 잔 하고 가시죠"란다. 내온 모든 게 혀에 달았다.


- "손님도 없고, 문 닫을 시간도 됐고..."

자신이 마실 술을 따로 들고 온 주인장. 적적하던 차에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는 자신이 완도 출신이지만 서울서 대학도 나왔고 남부럽지 않게 사업도 했지만 다 접고 이러고 있다며 짧지 않은 자서전을 썼다. 늙은 사내의 허세를 걸러 들으니 견딜만했다. 안주가 떨어지자 그가 업소 냉장고 깊숙이 팔을 넣어 무언가를 큰 접시에 담아 왔다. 정확히 어떤 생선의 '애'였는지는 잊었지만 자기 먹으려고 쟁여두었던 거라며 생색을 냈다. 그때 처음 입을 댄 생선의 간은 식감도 냄새도 별로여서 기름소금장 맛으로 먹었다. 이후, 언제 자리를 작파했는지는 도통 기억에 없다.


-  그렇게 대취한 날은 반드시 선잠을 깨고 지독한 숙취로 허덕였었다. 그런데 그땐 전날의 끄트머리 기억이 지워졌을 뿐 거짓말처럼 말짱했다. 후일담을 들은 선배가 "홍어 애를 대접받은 모양이네"라며 입맛을 차지게 다셨다.


ⓒ 스침

# 꽃에 절이라도 할까           

- 식당 주인장 말로는 1970년대까지 서울서 완도엘 가려면 직행버스로도 6시간이 넘게 걸렸단다. 청산도는 거기서 뱃길로 다시 40분은 족히 가야 한다. 청산도(靑山島), 산이 푸른 섬 혹은 푸른 산이 있는 섬이다. 쉬운 작명이다. 1990년대 초, 어느 출판사 편집부에서 뵌 소설가 한수산 씨는 "배움이 짧은 조부 탓에 '수산(水山)'이란 이름을 얻었다"라며 크게 웃으셨다. 섬의 작명가도 그랬는지 '고작' 청산이다. 하지만 어떤 왜곡도 허락하지 않는 이 단출한 이름이 좋다. 마치 한수산처럼. 


- 살다 보면 정신의 근육도 맥 빠진 다리처럼 풀릴 때가 있다. 사람이 걷는 건 다리의 일이 아니고 마음의 일이라고 했으니, 원 없이 걷고자 한다면 복닥거리는 제주 올레보다 사람에 덜 치이는 청산도가 낫다. 

ⓒ 스침

ⓒ 스침

 

ⓒ 스침

- 적어도 남쪽 바다는 뭍에서 봐서는 그림이 안 된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어머니가 뚝뚝 손으로 떼어 던진 수제비처럼 바다 위 뜬 섬들을 봐야 제격이다. 뉘 집 서방 잠버릇까지 두루 꿰는 객실 주민들 사이에 앉았기가 민망해 갑판으로 나갔다. 아직 바닷바람은 초야 치르는 새색시 옷고름도 다시 묶을 판이다. 

 

- 청산도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촬영된 곳이다. 주인공 유봉 일가가 북장단에 어깨춤을 추며 진도 아리랑을 흐드러지게 부르던 돌담길이 그 섬에 있다. 1993년 단관 단성사에서 봤던 <서편제>는 한국영화 사상 공식적으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소설가 이청준의 연작 단편 <남도 사람>을 <뿌리 깊은 나무> 기자 출신의 김명곤이 각색하고 주연했던 영화다. 나중엔 문화 행정가로 국립중앙극장 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낸 그를 만나 선정릉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짧은 인상평을 한다면, 반듯하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 지금이야 달라졌겠지만 그때는 포구에 들어서면, 몇 곳 되지 않은 식당과 노래방 그리고 모텔 간판이 조악해 보여 눈에 거슬렸었다. 다행인 것은 도회지의 어설픈 흉내는 그게 다였다는 사실이다. 선착장에서 잠시 언덕길을 오르면 영화의 한 장면이 연출됐다. 언덕은 잠시 시야를 가렸다가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 스침


# 박정하게 보낼 수 없어

- 계단식 논의 고저 차이는 발림 효과(gradation)로 풍광을 완성했다. 발치 아래 포구를 둔 언덕에 자리 잡은 당산나무와 당집. 바다는 섬사람들의 목숨을 잇기도 하고 끊기도 한다. 섬 아낙들은 당산나무 아래서 거친 손을 비벼 낭군의 만선과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아무리 절실해도 기원이란 게 어디 항상 이뤄지겠는가. 


- 어느 무심한 낭군이 당집 아래 초분(草墳)에 누웠다. 시신을 바로 땅에 매장하지 않고 땅이나 평상 위에 놓고 이엉으로 덮어 1년에서 3년 정도 그대로 두는 걸 초분이라 한다. 후에 뼈만 추려 매장하는 풍장은 서럽게 죽은 자를 바로 땅에 묻는 일을 박정하게 여겼기 때문일까?

  

- 온화한 기후 탓에 밭작물과 논농사를 병행한 이모작이 가능했던 청산도였지만 인구가 줄고 고령화되면서 "1년 농사 지어 농사 3년 먹었다"는 얘기는 전설이 되고, 보리도 소여물로 쓴단다. 소 혓바닥만 한 땅도 놀릴 수 없었던 섬사람들은 언덕을 개간해 계단식 논밭을 일궜다. '다랭이 논'을 이곳 사람들은 '구들장 논'이라고 불렀다. 논바닥에 구들을 깔아 남은 물이 아래 논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축조했기 때문이다. 


ⓒ 스침

#피 내린 계곡

이곳 사람들은 보적산을 백산이라고 부른단다. 하얀 갯돌이 산 정상에 많아서라고. 바닷가와 냇가에 있을 갯돌이 산 정상에 있다고?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 대항하기 위해 옛사람들이 갯돌을 산 정상에 날라다 놓았던 것이다. 해서 어르신들은 이 계곡을 '피 내린 계곡'이라고도 불렀다. 


일출이 일품인 진산리 해수욕장을 지나, 다시 해안도로를 타다 보면, 국화리란 작은 어촌이 눈에 들어온다. 멸치잡이를 주업으로 해온 이 어촌은 장흥, 관산 위(魏) 씨의 집성촌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청산도 사람들은 "멸치잡이와 연관이 컸던 대통령 재임 시절 멸치 가격이 워낙 좋아 이 마을 사람들이 뭍에다가 집 한 채씩은 샀다"라고 수군거렸다. 

  

- 신안 증도와 함께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Cittaslow)로 지정됐던 청산도. 관광객은 늘었지만 섬사람들은 여전히 바쁠 것 없어 보였다. 


  "뭣 하러 이런 촌구석에 온디야." 


식당 여주인은 겉으론 그렇게 말했지만 내심 싫지만은 않은 모양새였다. 사람 구경하기 어려운 시절, 뭍사람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이리라.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에게 몰래 위로가 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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