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침 Mar 08. 2024

'말빨'과 '글빨'

- 달변보다 눌변


ⓒ 스침

# '말빨' 보다 부러운 것

- 세상엔 말 잘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재치에 순발력까지 갖춰 '거침'없이 말하는 그런 사람들. 그런데 여러 분야의 전문 강연자들, 종교인과 정치인에 방송인까지 탁월한 '말재주'를 장착한 빅마우스들을 보면, 부러움 보다 겁부터 덜컥 납니다. 자신이 쏟아낸 무수한 말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 다른 진영의 사람도 독대를 하면 반드시 그의 사람이 된다고 했을 정도로 정치인 JP(김종필)의 '말빨(표준어 '말발'보다 말빨이 훨씬 잘 감긴다)'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정치는 말(언어)로 하는 전쟁이니 전투력 강한 '말의 투사'들이 있었겠죠. 특유의 유머와 서민을 대변하던 고 노회찬 의원, 논리와 진정성으로 좌중을 휘어잡던 DJ와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 솔직히 '사이비 종교'의 폐단을 다룬 다큐를 보면, "어떻게 저런 허무맹랑한 말을 믿고 신앙으로 여길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들지만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교주들의 말빨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네요. 하긴 그래야 가족을 버리게 만들고, 재산까지 송두리째 헌납하게 만들겠죠. 영혼을 파괴하는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 글로 먹고사는 문단에도 대표적인 '달변(達辯)'과 '눌변(訥辯)'이 있다죠. '조선 3대 구라'로 불렸다던 소설가 황석영의 언변은 대단했나 봅니다. 한 번은 타자기로 유명한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가 술집에서 약장수 뺨치게 구라를 풀던 황석영을 보고 술잔을 권하며 통성명을 했답니다. 황석영이 자신을 소설 <장길산> 작가라고 소개하자, 공 박사가 "자네 같은 건달이 약이나 팔 것이지 그런 대단한 작가의 이름을 팔고 다니냐"며 혼을 냈다고 하네요. 진위 여부야 모르겠으나 과장되었더라도 그의 말재간이 특출 났기에 만들어진 일화일 겁니다. 진보 계열의 황석영과 정확히 반대편에 섰던 소설가 이문열은 눌변이었답니다. 그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 솔직히 눌변까지는 모르겠고 달변은 아닌 듯한데, 뭐 어떻습니까.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로 문단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면 된 거죠.


- 한때 방송가를 주름잡던 모 교수의 아버지가 대형교회 목사였습니다. 아들의 방송을 본 아버지가 "방송으로 부흥회를 하더구나"라고 했답니다. 구라도 유전인자인가 보죠.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울 때는 상대가 '단답형'일 때입니다. 시간은 한정돼 있고, 밀도 있게 진행하려면 똥줄이 타죠. 단답형엔 두 유형이 있습니다. 대개 무성의하거나 말주변이 없어서죠. 타고난 눌변인 건 해결도 가능하고 용서도 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긴장도를 낮추면 되고, 천성을 나무랄 순 없죠. 하지만 무성의한 태도의 인터뷰이들은 답이 없습니다. 구라가 잔뜩 들어간 원고가 될 수밖에요.


- 저는 달변가를 부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과장되고 치장된 현란한 말 잔치만큼 허무한 것이 없으니까요. 내심 부러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 스침

# 여전히 탐나는 '글빨'

- 솔직히 조미료 듬뿍 들어간 달변보다는 차라리 눌변이 낫죠. 쉽고 진솔하고 단정해 담박(淡泊)한 눌변은 타인에게 피해를 덜 주기도 하고 용서도 됩니다. 제가 부러운 건 말빨이 아니고 글빨입니다. 지금껏 돈과 미모를 부러워한 적은 없지만 유독 글재주만은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  에디터인 저는 경제, 사회, 건축,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의 필자들에게 원고 청탁을 하고 삽니다. 대학교수부터 해당 분야의 전문가, 프리랜서 작가들에게까지. 그런데 기일을 넘겨받은 원고는 늘 청탁 의도와 어긋나 있고, 분량은 넘치거나 모자라고 오탈자는 기본에 비문(非文)과 동어반복 투성이죠. 메시지나 논리도 빈약하고, 기승전결의 기본 구성조차 갖추지 못한 원고가 99%라서 늘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런데 간혹 눈이 시원해지는 원고가 수중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 쾌감이라니.


- 게다가 그 필자가 저보다 젊다면 마치 제 자식이라도 된 양 주책없이 뿌듯해집니다. 이제야 왜 제 은사님이 마음에 차는 젊은 시인들을 불러다 밥을 샀는지 이해가 니다. 글밥을 먹는 필자들만 좋은 글을 쓰는 건 아닙니다. 인문학 분야 관련자도 아니고 글과는 전혀 무관한 직종의 필자들 중에서도 반짝거리는 문사들과 조우할 때가 있거든요.


- 직업적 편견이겠지만 어떤 교수의 난삽한 글을 마주하면 그의 학문적 성과와는 무관하게 속으로 그를 폄하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간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학위가 없더라도 해당 분야의 이슈를 대중에게 잘 설명할 수 있는 필자 말이죠. 학벌 위주의 우리 사회는 그런 필자들을 여전히 키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국에는 사용설명서(ueser manual)만 제작하는 '매뉴얼라이터'가 따로 있다고 하는 데 말이죠. 이제는 AI가 논문과 기사 작성을 넘어 텍스트만 입력해도 현실 세계의 물리법칙을 적용해 정교한 영상을 만든다고 하네요. 아! 진위(眞僞)를 분간할 수 없는 세상이 왔나 봅니다. 많이 두렵네요. 솔직히 이런 현실은 어려서 읽은 SF소설에서도 보지 못한 광경이거든요.


- 하지만 아날로그 세대인 저로선 AI가 '고급한 글쓰기'를 대신하지 않아 주었으면 합니다. 휴먼의 영역으로 남았으면 하는 거죠. 글맛이란 게 문장의 정확도와 축적된 데이터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믿으니까요. 고종석의 문장과 김훈의 문장이 다른 맛을 내는 것처럼 말이죠. "전자책(e-북)으로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란 기사를 본 게 1994년이었지만 아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디 저 사는 동안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기를. 가끔 후배들이 묻곤 합니다. 대체 잘 쓴 글이란 어떤 글이냐고요. 개인적으로는 "글도 말과 같아서 쉽고 진솔하고 단정해서 담박해야 한다"라고 믿습니다.


ⓒ 스침

# 금단의 만화방과 웹툰

- 어릴 적 저는 찬대와 만선이가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하던 만화대여소(만화방)에 발을 자주 들이지 못했습니다. 체제순응형으로 자란 탓도 있지만 무협지를 보던 험상궂은 인상의 형들이 무서워서였죠. 그러니 또래들이 줄줄 꿰던 와룡생과 김용, 양우생의 무협소설과는 담을 쌓았고, 제겐 글쓰기의 제한적 요소가 되었습니다. 문청 시절, 그런 고백을 들은 친구가 "너 소설은 못 쓰겠다"고 하더군요.   


ⓒ 스침

- 운동장에서 '불량저질 만화책 화형식'을 하던 시절에 국민학교를 다녔던 제가 환갑이 되어서 만화카페엘 가 봤습니다. 별천지더군요. 취식도 하면서 제 집처럼 누워 만화책을 볼 수 있다니. 길 건너 도서관보다 낫던데요.


- 불량식품과 함께 근절의 대상으로 지목돼 화형(?)까지 당했던 한국 만화계의 후예들은 참 대단합니다. 웹툰(webtoon)이란 새로운 장르까지 만들어냈으니 말이죠.


- 소비하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웹툰 얘기를 꺼낸 건 '웹툰의 글빨' 때문입니다. 2010년대 이후 방송 채널들은 앞다퉈 웹툰 원작의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고, 영화화도 줄을 잇고 있습니다. 제가 보고 나서 "이야! 재밌다"라고 했던 드라마와 영화 다수가 웹툰 원작이더군요. 서사와 만화(그림)가 결합돼 뿜어내는 상상력의 에너지가 새로운 형식의 글빨이 된 거죠. 글과 관련해 변하지 않는 요소 중 하나가 신화(myth)이고, 시각적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서사와 그림의 조합인 웹툰(만화)은 참 매력적인 장르가 아닐 수 없죠. 이참에 저도 입문할까 봐요.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하면서 말이죠. 그러기엔 쌓아둔 책이 너무 많지만요.

ⓒ 스침








이전 08화 "흙도 불맛을 봐야 술잔이 되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