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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Mar 04. 2024

"곶감은 달빛에도 익지요"

- 도처에 시인이고 꽃이다

ⓒ 스침


# 흙 속은 이미 봄인 것을

- 참 어리석었죠. 꽃이 피어야만 봄인 줄 알았으니. 안 그래도 감질나게 왔다 갈 봄. 왜 이리 더디냐고 짱알거릴 때 흙 속은 이미 말캉한 봄인 줄 몰랐네요. 꽃은 이제 그만 헤어지자며 흔드는 봄의 손인 것을.

  

- 제 기억 속 첫 꽃은 묘비 없는 무덤 옆 허리굽은 할미꽃과 보랏빛 제비꽃이었어요. 햇살을 이마 가득 펴 바르고 비스듬히 무덤에 기대 만지작거리던 할미꽃의 촉감. 만년필에 보라색 잉크를 넣게 된 것도 그때의 제비꽃 탓이겠죠.   


- 비가 와야 간신히 먼지가 가라앉던 흙길. 그 길을 용맹하게 달리던 양키 트럭에서 던져준 추잉껌과 비스킷, 씨레이션박스는 철부지들의 보물상자였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핏대 세워 "양키 고 홈!"을 외쳤지만. 그때 꽃그늘에 앉아 팔뚝을 간지럽히던 바람에 속눈썹이 날리던 안집 순희는 삼륜차 타고 떠나는 제게 꽃물 든 손을 흔들었어요. 그랬더랬죠.



ⓒ 스침




# 기어이 꽃몸살을 앓아야

- 여섯 살의 첫 꽃 기억이 바랠 대로 바래진 마흔 살이 되고서야 두 번째 꽃을 보았습니다. 딱 마흔 되던 해였죠. 터널 옆 흐드러진 진달래에 눈이 가려져 차를 멈추고 아이처럼 울었더랬습니다. 제게 꽃은 아이가 되어야 비로소 보이나 봅니다.  


- 꽃을 봐야만 서럽게 우는 건 아닙니다. 강원도 어느 산길, 장사익의 <찔레꽃>을 듣다가도 울었으니까요.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안 울고 배길 재간이 없었네요. 제 울음소리에 꽃잎이 흔들리진 않았지만요.  








ⓒ 스침
ⓒ 스침

# 해 바꿔 같은 꽃대에 앉지 않아도

- 봄꽃은 순서를 두고 온다지요. 매화가 피고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 순이라죠. 제겐 먼저 보이는 순서대로 피지만요. 이런 봄을 몇 번이나 더 맞이할지 장담할 수 없네요. 열 번 아니면 스무 번. 숫자로 헤아리면 더 간절해지는 봄입니다.


- "기어이 꽃몸살을 앓고야 옵니까/ 성큼 내 곁인 걸 알겠는데/ 떠났다 필시 오는 당신, 해 바꿔 같은 꽃대에 앉지 않아도 그대 오겠지만/ 훌쩍 자리 뜬 난.../ 재촉하고 또 안달했던 것 미안하오." - 스침


- 유람은 아니었지만 그간 참 많이도 싸돌아 다녔습니다. 외딴섬에서부터 점심 끼니를 때우면 서둘러 어두워지던 두메산골까지, 뻔질나게도. 어디서 만난 누구였는지 기억에 없지만 절집 처마에 걸린 홍매 같은 곶감이 실하다 했더니, "곶감은 달빛에도 익지요"라고 받더군요. 도처에 시인이고 꽃입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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