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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Mar 16. 2024

키워드 하나로 읽다

- feat. 군산(群山)

# '쌀'과 군산      

- 요즘 여행은 유명 관광지 위주에서 맛집 투어로 주어가 바뀌었다. 검색되지 않는 '로컬 맛집' 정보를 갖고 있으면 지인들에게 생색내기 그만이다. 군산의 아이콘이 빵집 이성당이 된 세상이다. 하지만 내게 군산은 식민지 상흔과 근대 유산이 혼재된 아픈 땅다.


- 내게 군산은 '쌀'로 상징된다. 군산항에 한반도 최초로 아스팔트 도로가 깔리고 철도까지 연결된 것은 당시로선 희대의 사건이었다그 첨단의 이면에는 곡창지대인 호남의 쌀을 자국으로 수탈해 가기 위한 일제의 탐욕이 숨어 있었다. 만경강과 금강을 낀 드넓은 평야를 배후지로 둔 전라북도 군산은 1876년 강화조약으로 시작된 조선 쌀 수탈의 전초기지였다.  

ⓒ 스침

ⓒ 스침

- 그렇게 수탈된 조선 백성의 쌀은 일본 신흥 공업지대 노동자들의 값싼 식량이 되었다. 당연히 조선의 식량 사정은 악화됐고, 폭등한 쌀금에 민초의 주린 배는 등에 붙었다. 춘궁기에 입도선매로 쌀을 넘겨버린 농민들은 추수철이 되어도 먹을 것이 없었다. 궁박 판매이자 기아 수출이었다. 그 와중에 제국주의의 앞잡이들은 잇속을 챙겼고, 그들의 후손은 여전히 풍족하다.

  

물가 상승에 따른 빈농층과 도시 빈민들의 생활고는 한계치를 넘어섰다.1894년 호남지방에서 시작돼 전국적으로 번진 동학농민전쟁도 개항 이후 시작된 일본으로의 쌀 유출과 그로 인한 농민층 몰락을 배경으로 한다. 농민군들은 “외국 상인들이 마음대로 내지에 들어와 상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 달라”라고 절규했다.   

 

- 1899년, 대한제국이 개항장의 관세수입 증대를 기대하며 항구를 열기 전에도 군산은 조창(漕倉)이 있어 호남 조운(漕運)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개항 이후 객주와 상회사(객주들의 조합) 등이 번성하기도 했으나 그리 길지 않았다.

ⓒ 스침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은 중단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몰려들었다. 군산항의 조선인 객주들은 조합이나 회사를 차려 일본 상인들에게 대항해 보았으나 자금력으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병합 이후에는 총독부가 객주업을 통제하면서 조선인 상회사는 더 이상 군산항에 존재할 수 없었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 유역의 토지들도 대거 일본인 지주들에게 넘어갔다. 일본인 농장에서 생산된 미곡들은 대일 수출용이란 미명 아래 그렇게 수탈되었다김제와 익산, 옥구(임피) 등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쌀도 군산미란 이름이 붙어 일본행 배에 실렸다.




ⓒ 스침

1914년 식민지 조선 전체의 쌀 수출량 중 군산이 40.2%, 부산이 33.5%, 인천이 14.7%를 차지했다고 한다. 흔히 ‘면의 목포’와 함께 ‘쌀의 군산’이라고 불릴 만큼 군산은 개항장 중에서도 쌀 수출로 특화된 항구였다.   

ⓒ 스침

일본인 농장들은 후지모토(藤本), 오오쿠라(大倉), 미쓰비시(三菱) 등 일본 대자본과 결탁하여 기업형 농장으로 운영되었다. 수리시설을 개선하고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등 생산성 증대를 도모한 결과 쌀은 증산되었으나 그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되었기 때문에 조선 농민들의 궁핍은 더욱 심화되었다. 1927년 이엽사 농장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대표적인 소작민들의 저항이었다. 농민들은 이엽사 농장의 소작료 인상에 맞서 소작료 납부 거부로 저항했다. 그런가 하면 군산항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던 노동자들은 1920년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일제의 수탈에 저항하기도 했다.           

ⓒ 스침

ⓒ 스침

# 도시 전체가 근대 역사박물관

- 이가 갈리도록 아픈 역사의 현장은 근대의 상징물들로 아프게 남아 있다. 군산은 일제의 미곡수탈 기지로서, 쌀을 빠르게 반출할 수 있도록 일찍부터 교통망이 체계적으로 갖춰졌다. 한반도 최초의 아스팔트 도로인 전군가도(전주-군산간 26번 국도)가 1908년 개설되었고, 1912년 이리(익산)와 군산항을 잇는 군산선 철도가 호남선의 지선으로 건설되었다. 군산선엔 주요 일본인 농장마다 역이 개설되고, 철도와 군산항을 직접 연결하여 쌀을 쉽게 운반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군산항에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부잔교(floating pier)가 설치되기도 했다. 군산항 주변에는 조선 쌀을 일본인 입맛에 맞는 백미로 도정하기 위한 정미공장들이 들어서고 주조장들도 생겨났다.


그리하여 군산에는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고급 주택, 일본인을 위한 절(동국사), 제18은행 같은 건물들이 남게 된 것이다.


- 일제강점기 군산에서는 다다미가 깔린 영화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거나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요즘에도 날마다 관광객들이 긴 줄을 서는 빵집(이성당)도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춰 생겨난 곳이다.

  

그렇듯 군산은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일본에 의해 이식된 식민지적 근대문화를 표상하기도 한다.


여행지는 넘치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 정보에 체하지 말고 시류가 된 맛집기행에 이런 식의 키워드를 더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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