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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Mar 20. 2024

우리는 각자 측은(惻隱)하다

- 영화 <Past Lives>

ⓒ CJ ENM

# 下手의 下數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하야카와 치에의 <플랜 75> 장재현의 <파묘>, 최근 본 영화들이다. 앞선 두 작품은 짧게 관람평을 했으나 인상 깊었던 <파묘>는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24.03.19) 관객수 1천만 명 돌파를 목전에 둔 예상치 못한 흥행으로 다양한 콘텐츠가 넘쳐나서다. 비전문가가 얼치기로 동어반복할 필요는 없고, "취약한 장르에서 거둔 의미 있는 성과"였다고는 말하고 싶다. 덧붙여 굿당을 오가며 황해도 만신(萬神)들을 인터뷰하고, 몇몇 해 굿당을 오가며 12 거리 굿을 촬영했던 경험상 배우 김고은의 디테일한 연기는 싱크로율이 매우 높았다.


- 몇 번을 지웠다가, 고심 끝에 사족을 붙인다. 한 권력자를 그린 다큐 감독이 <파묘>에 진영 프레임을 씌워 언론플레이를 한 모양이다. 그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참 하수(下手)다.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한다는 기본을 모른단 말인가. 십분이해해 얕은 수로 손에 떡고물이라도 묻힐 요량이었다고 해도 현재 스코어를 보니, 더욱 한심한 하수(下數)다.


- 나는 그의 작품을 보지 않을 것이다. 권력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자를 존중하거나 존경할 마음이 없다. 역사를 통해 그런 자들의 말로는 비참했고, 그 논리는 앞으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배웠다. 부디 이 민족이 권력을 주체하지 못할 무능하고 무도한 자들에게 권좌를 허락하지 말았으면 한다. 언제까지 역사의 수레바퀴를 더디게 굴릴 것인가.    


# 전생(Past Lives)

- 평일 낮 영화관은 한산했다,가 아니라 적막했다. 관객들로부터 절찬(絶讚)을 받지 못한 <패스트 라이브즈>는 '절찬리 상영' 대신 '독관'의 호사를 허락했다. 요즘 영화들의 빨라진 호흡과 높은 레벨의 자극성과 비교하면 이 영화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전개는 느리고 에피소드는 밋밋하기 짝이 없다. 로맨스물이지만 비극적이거나 애절하지도 않다. 매운탕이 아닌 맑은탕이다.


-  이어령 선생이 '말(言)의 설사'라고 명명한 랩(rap)과 마라탕에 길들여진 MZ세대에게도, 애틋한 첫사랑의 최루를 기대한 기성세대에게도 소구력이 떨어지는 소재와 구성이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아버지가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이다)의 첫 연출작인 <패스트 라이브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12살 동갑내기 친구인 여주와 남주는 여주의 캐나다 이민으로 헤어진다. 12년 후, 연락이 닿은 둘은 뉴욕과 중국에서 각자의 삶을 살며 페이스북 화상 통화로만 인연을 이어간다. 이후 결혼한 여주를 만나러 솔로인 남주가 뉴욕을 찾고, 짧은 데이트를 마친 둘은 여주의 남편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이내 헤어진다.


- 타인의 삶에 관음증을 가진 나조차 관심이 가지 않는 스토리다. 굳이 표현하자면 '파스텔톤 판타지' 정도였다. 판타지라고 얘기하는 건 보통의 첫사랑은 풋풋하거나 애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서툴고 찌질할 뿐. 그런 점에서 홍상수의 문법이 훨씬 사실적이다. 2002년 그의 4번째 장편 <생활의 발견>을 보고, '나'를 들킨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화가 났었다. 나의 치졸한 모든 사랑에 대해.


- 영화에 매료당하진 않았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나의 추억 한 가지를 소환했다. 국민학교 때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살던 누나가 있었다. 고작 한 살 터울이었지만 환한 얼굴의 그는 어른스러웠고 심성까지 고왔다. 동부이촌동으로 이사 간 누나네 집에서 가수 남일해의 <빨간 구두 아가씨>를 들으며 '저런 저음을 가진 남자가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얼마 후 누나는 턴테이블과 LP판이 놓여 있던 거실에서 불의의 사고로 그만 세상을 떴다.  


- 우리 가족은 중학교 2학년 때 캐나다로 이민 갈 기회가 있었지만 나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 이후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누나의 여동생과 가족들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마흔이 넘어 서울에서 그 여동생과 재회한 적이 있다. 자매의 외모가 전혀 닮지 않아 누나를 떠올리진 못했다. 다행히 환영처럼 남아 있는 누나의 이미지는 유지되었다. 끊긴 인연은 그런 채로 남아 있어야 자연스럽다.

ⓒ CJ ENM
ⓒ CJ ENM

# 측은

-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와, 노벨상에 이어 퓰리처상과 토니상으로 자신의 꿈을 수정하는 성취욕이 강한 여주와 남주는 긴 이별 끝 짧은 만남을 마친다. 그때 남주가 다음 생에 우리의 관계는 어떨지를 묻는다. 그러자 여주는 "그때 봐"라고 말한 뒤, 돌아서서 흐느끼고 여주의 남편은 그런 여주를 안아준다.


- 로맨스 영화 두 주인공의 감정선은 진폭이 그다지 크지 않다.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에서조차 얕은 긴장감이 돌뿐 격정적이진 않다. 오히려 한국어로만 잠꼬대를 하는 여주의 꿈길에 동행하지 못하는 유대인 작가 남편의 질투와 푸념이 훨씬 순애보적이며, 한국적(?)이다. 영화는 그렇게 마무리된다. 사소하고 건조한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 영화였다.


- 전생과 내생이야 과학이나 확신의 영역이 아니고, 다만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있음은 경험적으로 알겠다. 나의 닉네임이 '스침'인 것도 사랑, 우정, 행복, 불행이란 것도 잠시 스치는 티끌 같은 인연에 불과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먹먹한 표정으로 뉴욕을 떠나는 남주와 울음이 터져버린 여주, 그를 품에 안아주는 여주의 남편. 우리는 그렇게 각자 측은(惻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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